모처럼 학교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종소리와 수업 시간의 질서 있는 조용함과는 조금 달랐다.
운동장에서 구르며 흙을 묻히는 소리, 부엌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속삭임, 그리고 산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걸음들. 그 모든 소리는 한때 멈췄던 교실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생명력이었다.
기자가 방문한 곳은 충북 단양의 한 폐교. 이곳은 매년 여름이면 특별한 손님들을 맞이한다.
바로 ‘자연 속 여름학교’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어린이 자연 체험형 여름캠프의 참가자들이다.
이 캠프는 단순한 방학 프로그램이 아니다.
교실은 교실로, 운동장은 실습장으로, 인근 산과 하천은 아이들의 교과서가 된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하며 자연과 친구가 되고 평소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배움’을 경험한다.
캠프를 기획한 마을 협동조합과 전직 교사들의 노력으로, 폐교는 다시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공간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자연에서 놀며 배우는 학교’의 하루
기자는 이틀간 캠프에 동행하며,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함께 경험해보았다.
하루는 아침 7시, 새소리와 함께 운동장에서 가볍게 몸을 푸는 스트레칭으로 시작됐다.
그 다음에는 직접 밭에 나가 감자와 상추를 수확하고, 수확한 채소를 함께 씻고 다듬어 점심 반찬으로 만들었다.
모든 과정은 강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아이들은 도시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자급의 기쁨'을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오전 활동은 주제별로 구성되었다.
첫째 날엔 나뭇잎을 활용한 자연 엽서 만들기, 둘째 날엔 폐목재를 이용한 곤충 호텔 제작 등, 손과 머리를 동시에 쓰는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각 활동을 진행하는 선생님은 대부분 지역에 거주하는 생태 교육 전문가 혹은 전직 교사들이었다.
덕분에 내용은 알차고 설명은 쉽고 친절했다.
오후 시간에는 교실이 명상실이나 토론장으로 바뀌었다.
누군가는 흙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누군가는 오늘 느낀 점을 일기장에 조용히 써 내려갔다.
이 캠프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로운 몰입’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하고 싶은 활동을 선택했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질문할 때만 곁에서 도왔다.
폐교가 아이들에게 주는 특별한 감정
캠프에 참가한 한 초등학교 4학년 아이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는 학교인데, 공부를 안 해도 돼서 이상하게 좋았어요.”
이 말은 아이의 솔직한 표현이자, 이 캠프가 가진 정체성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이 폐교는 단순한 학습 공간이 아닌, 경험과 감정이 살아 있는 교육 공간이었다.
낡은 칠판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오래된 방송실 스피커를 통해 자기 소개를 하며 웃음을 나누고 예전 교장실은 아이들의 수면실로 꾸며져 있었다.
공간을 억지로 새로 만들지 않고, 과거의 흔적을 살리면서 아이들의 상상력으로 덧입힌 구성이 이 캠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교실 복도 끝에 놓인 오래된 피아노에 손을 대며 ‘이건 진짜 옛날 학교 같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말엔 부정적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낯선 공간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안에 자신만의 시간을 새롭게 쌓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폐교가 가진 정서적 힘이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을과 아이들, 그리고 계절이 함께 만든 교육
이 캠프의 또 다른 특징은 ‘지역 주민과의 연계’였다.
마을 어르신들은 아이들과 함께 밥을 짓고, 들꽃 이름을 가르쳐주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아이들은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이틀째가 지나자 할머니 손을 잡고 산책을 하거나 함께 바느질을 배우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
그 장면은 기자가 보기에, 세대와 공간이 뒤섞여 만들어낸 최고의 교육 현장이었다.
캠프 마지막 날, 아이들은 손수 만든 나무 배지를 옷에 달고, 마을회관에서 작게 준비한 발표회를 열었다.
누구는 나무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고, 누구는 시골에서의 일주일을 글로 써 낭독했다.
모든 발표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진심과 자신감이 있었다.
관객으로 앉아 있던 마을 어르신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운영진들은 말없이 박수를 보냈다.
그 순간, 기자는 이 폐교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과 계절, 감정이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마을의 중심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잊히지 않을 배움, 돌아가고 싶은 학교
기자는 캠프 마지막 날 밤, 교실 한가운데서 아이들과 함께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밤, 쏟아질 듯한 별빛 아래서 아이들은 낮에 만든 나무 엽서를 들고 부모님에게 쓸 편지를 적고 있었다.
누군가는 ‘다음에 또 오고 싶어요’라고 썼고, 또 다른 아이는 ‘이곳이 진짜 학교였으면 좋겠어요’라고 적었다.
그 말들 속엔 아쉬움과 감동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기자는 이 체험이 단지 특별한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폐교는 여전히 우리 곁에 많이 존재하고, 그 대부분은 침묵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 사람이 들어오고, 아이들의 소리와 계절의 변화가 스며들기 시작하면 그 공간은 다시 숨을 쉰다.
이 여름캠프는 단지 교육의 한 방식이 아니라 폐교라는 공간이 줄 수 있는 감정과 가치를 증명하는 사례였다.
기자는 돌아오는 길, 캠프 참가 안내지를 하나 챙겨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감정은 오래 남길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언젠가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이 교실을 찾았을 때, 그 기억이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배움이 아니라 ‘느낌’이 남는 곳
기자는 도시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문득 그 교실의 벽지를 떠올렸다.
아이들이 만든 꽃 모양 종이장식과 손바닥 도장이 붙어 있던 그 벽은,정갈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그 속엔 ‘잘하려고 애쓰는 마음’보다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용기’가 담겨 있었다.
이 폐교 캠프에서 아이들이 배운 건, 지식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였다.
자연을 가까이하는 법, 낯선 어른과 어울리는 법,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는 법. 이런 ‘살아 있는 기술’이야말로 지금 시대의 아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배움 아닐까. 기자는 이 체험을 통해 교육에 대한 관점도 조금 달라졌다.
반듯하게 앉아 똑같은 답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얼마나 자주 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폐교라는 공간은 그런 고민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교실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배움이 되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떠난 폐교에 남은 온기
캠프가 끝난 다음 날 아침, 기자는 마지막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책상이 조금 어긋나 있었고, 복도 끝엔 누군가 두고 간 슬리퍼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칠판 위엔 분필로 쓴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글귀가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떠났지만, 공간에는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온기는 전기나 기계로는 만들 수 없는, 사람의 체온이었다.
폐교는 더 이상 폐허가 아니었다.
그곳은 계절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나고, 누군가의 첫 캠핑, 첫 발표, 첫 추억이 만들어지는 장소였다.
기자는 생각했다. 사라진 공간이 아니라, 잠시 쉬고 있었던 공간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고. 그리고 그 공간을 다시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건 결국 마음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 교실을 떠나며 그렇게 다짐했다. 언젠가 또 다른 폐교에서, 또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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