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폐교 활용공간 리뷰

폐교를 리모델링한 마을 책방 체험기

기자가 처음 이 마을을 찾은 건, 단순히 시골 여행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산과 들, 그리고 계절의 냄새를 맡고 싶다는 소박한 이유였다.
그런데 지도에 ‘학교책방’이라는 이름이 표시된 걸 보고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처음엔 마을 도서관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은 기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특별한 공간이었다.
교실 하나가 통째로 책방이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계절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전북 고창의 외딴 마을에 위치한 이 책방은 10년 전에 문을 닫은 폐교 분교를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이곳은 책을 팔기도 하지만, 동시에 읽는 사람들의 머무름을 위해 설계된 곳이었다.
기자가 방문했을 땐 평일 오후였지만 교실 안에는 두세 명의 방문객이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따뜻한 공기가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폐교 교실을 그대로 리모델링하여 살린 책방, 기억과 현재가 만나는 구조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흑판이 그대로 남아 있는 벽면과 옛날 나무 바닥이었다.
분필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 분위기는 분명 ‘학교’였다.
기자가 앉은 자리에는 과거 학생들이 앉았을 법한 작은 나무 의자가 있었고, 책장은 교실 뒤쪽 벽면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책장은 현대식 인테리어나 디자인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교실 구조를 최대한 손상하지 않고, 그 안에 조용히 책만을 들여놓은 듯한 배려가 느껴졌다.

책의 구성도 특별했다.
대형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신간 베스트셀러보다는 지역 작가들의 시집, 생태와 농촌에 관한 에세이, 삶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철학서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운영자는 “이 책방은 판매보다는 공유와 공존에 목적이 있어요.
한 권을 고르기보다, 한 문장을 천천히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공간은 조용했다. 책장 넘기는 소리, 창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마을방송의 아날로그 음악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이 책방은 책을 파는 곳이라기보다,  사람의 시간을 천천히 풀어주는 공간처럼 다가왔다.

폐교 교실을 리모델링한 마을 책방 체험기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감정이 머무는 독서의 시간

기자는 책방 한쪽에 마련된 낮은 테이블에 앉아 한 권의 시집을 펼쳤다.
시인은 낯선 이름이었지만, 그의 문장에는 익숙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기자는 도시에서 잊고 있던 감각들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읽는 것’은 결국, 자신을 마주보는 일이라는 걸 이 조용한 교실에서 처음 깨달았다.

그날 책방에는 나이 지긋한 부부 한 쌍과 자전거를 끌고 온 청년 한 명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도 음악을 켜지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공간은 공허하지 않았다.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은 고요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책방 한쪽 벽면에는 손글씨로 쓴 문장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여기는 책보다 사람이 더 소중한 공간입니다.”
기자는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은 많지 않았지만, 사람의 온기가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온기는 독서라는 행위를 더욱 깊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공간을 만든 사람들,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마음

책방은 단순히 책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 공간을 만든 운영자 부부는 7년 전 귀촌해 이 폐교를 임대했고, 그때부터 교실을 손수 수리하며 책방을 하나씩 채워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책을 하나씩 들이고, 사람을 한 명씩 만나면서 교실에 온기가 생겼죠.” 운영자의 말엔 애정이 묻어 있었다.

책방에는 단골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마을 주민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나누는 모임, 도시에서 내려오는 젊은 작가들과의 낭독회,
아이들을 위한 책 읽는 주말 프로그램까지. 이 책방은 단순히 판매공간이 아닌, 지역과 외부가 연결되는 ‘느슨한 문화 플랫폼’이자 살아 있는 마을의 책장이었다.

기자는 교실 뒷문을 통해 나가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틀 사이로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책장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누군가는 글을 읽고, 누군가는 조용히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멈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기자는 그 순간, 책보다 공간이 주는 메시지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앉고 싶은 자리

책방을 나서기 전, 기자는 손에 쥐고 있던 시집을 조용히 구입했다.
책 제목은 《천천히 읽는 바람》이었다.
책을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왔을 때, 멀리 산 너머로 햇살이 퍼지고 있었다.
교실이라는 공간이 원래 이렇게 따뜻했나?
기자는 그날 처음, 학교가 단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동시에 머무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책방 앞 벤치에 앉아 마지막으로 공간을 바라보며, 기자는 생각했다.
이 책방은 특별한 마케팅도, 번쩍이는 간판도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 힘이 있었다.
그건 단지 ‘폐교를 활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시간을 다시 살아 있는 감정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진정한 가치가 있었다.

기자는 이 책방에 다시 오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때는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
함께 읽고 싶은 사람에게, 이 조용한 교실의 책장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아, 한 문장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고 싶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뀌어 존재하는 학교

기자는 책방을 나선 후에도 한동안 학교 담장을 따라 걸었다.
어릴 적 다녔던 학교와 어딘가 비슷한 풍경이 겹쳐 보였다.
학교라는 공간은 본래 ‘사람이 오고 가는 흐름’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그 흐름이 끊긴 순간, 폐교가 되었다.
그러나 흐름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 그 공간은 다시 ‘학교’가 된다.
수업은 없지만 배움은 있고, 종소리는 없지만 고요한 울림이 있는 이 책방은 분명 새로운 형태의 ‘학교’처럼 느껴졌다.

운영자는 “우리는 이 책방을 '학교책방'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마을과 계절이 만든 책장이라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곳은 단지 책이 놓인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의 리듬을 찾는 곳, 삶의 속도를 늦추는 연습장이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머무를 수 있는 공간. 폐교는 그렇게, 또 하나의 역할을 찾아가고 있었다.

 

남겨진 교실이 알려주는 것들

돌아오는 길, 기자는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읽은 시집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든 기억은 서랍 속에 넣을 수 없고,
어떤 기억은 공간 안에서만 살아난다."
그 구절은 오늘의 방문과 너무 잘 어울렸다.
사라질 뻔한 학교가, 잊힐 뻔한 감정의 서랍을 다시 열어주고 있었다.

책방으로 바뀐 교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장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천천히 다가와 마음에 말을 거는 풍경.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 조용히 책을 넘기던 손끝, 아이들이 남기고 간 분필 자국, 햇살에 바래진 창문틀까지. 그 모든 것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기억이 되었다.
기자는 이 책방을 잊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의 오후, 조용한 교실은 기자에게 무엇보다 귀한 문장을 하나 선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