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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부여 연잎밥 장인, 향기로운 잎에 담아낸 백제의 시간

 충남 부여는 한때 찬란한 백제의 수도였다. 지금은 고요한 농촌 마을이지만, 곳곳에 백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부여를 대표하는 전통 음식 중 하나가 바로 연잎밥이다. 신선한 연잎에 찹쌀, 잡곡, 견과, 대추, 밤 등을 정성껏 담아 찌는 연잎밥은, 백제 귀족의 식문화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에서는 지금도 옛 방식 그대로 연잎밥을 짓는 장인이 있다. 30년 넘게 연잎밥을 짓고 있는 한 여성 장인은 말한다. “연잎밥은 시간을 싸는 음식이에요. 눈에는 작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손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죠.” 이 글은 그가 만들어낸 연잎밥 한 송이에 담긴 향기, 기술, 기억, 그리고 백제의 시간을 재현하는 이야기다.

 

연잎은 여름에 태어나 가을에 맛을 낸다 – 연잎 수확의 정성

 연잎밥의 핵심은 밥이 아니라 연잎이다. 부여 백마강 인근의 논에서는 여름이면 연잎이 자라는데,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가 수확 적기다. 장인은 매년 이 시기, 이른 아침 연잎을 직접 따러 연밭으로 나간다. “햇살이 너무 강하면 잎이 질겨지고, 늦으면 향이 날아가요. 연잎은 아침이 가장 예쁘죠.” 그녀는 연잎의 두께, 색, 결을 손끝으로 확인하며 사람보다 먼저 깨어난 자연의 시간을 따라간다.

수확한 연잎은 그날 바로 깨끗한 물에 여러 번 씻고, 데쳐서 결을 부드럽게 만든 뒤 한 장씩 펴서 말린다. 잘 마른 연잎은 특유의 연한 초록색을 띠며 은은한 향을 머금는다. “잎이 얇으면서도 부드럽고, 찜기에서 향이 올라오게 만드는 게 제일 좋은 거예요.” 그녀는 연잎을 그냥 식재료로 보지 않는다. 연잎은 단지 밥을 싸는 도구가 아니라, 밥에 숨을 불어넣는 껍질이자 향기로운 그릇이다.

말린 연잎은 그늘에서 차곡차곡 쌓아 6개월 이상 보관할 수 있다. 계절을 넘겨 사용하는 연잎은 향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연잎은 묵을수록 은은한 단맛이 올라와요. 마치 김치가 익는 것처럼요.” 장인은 계절에 따라 다른 향을 가진 연잎을 사용해, 손님에 따라 다른 연잎밥을 내놓기도 한다.

이처럼 연잎은 단순한 포장재가 아니다. 연잎 하나에 담긴 수고와 시간이 이미 반찬 이상의 역할을 한다. 연잎밥의 시작은 밥솥이 아니라 연잎을 이해하는 감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연잎밥은 한 끼가 아니라 하루를 들여 만드는 음식

 연잎밥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먼저 찹쌀과 멥쌀, 흑미, 율무, 수수, 녹두 등 다양한 곡류를 씻어 불린다. 그 비율은 계절과 날씨, 연잎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엔 찹쌀을 줄이고, 겨울엔 많이 넣어요. 너무 찰지면 향이 덜 올라오거든요.” 장인은 30년 경력으로 날씨와 곡물의 상태를 맞추는 법을 몸으로 기억한다.

밥 속에 넣는 재료는 제철에 따라 다르다. 봄에는 취나물, 여름엔 들깨잎, 가을엔 밤과 대추, 겨울엔 말린 더덕과 표고버섯이 들어간다. 그 재료들은 모두 손질 후 간장과 참기름으로 살짝 무쳐, 양념이 아닌 향과 조화를 위한 밑간을 한다. “맛을 세게 내면 연잎 향이 가려져요. 연잎밥은 조용한 음식이니까요.”

 

이후 밥과 속재료를 버무려, 연잎 위에 한 숟갈씩 정성껏 얹는다. 연잎을 접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둥글게, 사각으로, 세모형으로 접는 방식은 손님이 누구냐, 어떤 날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잔칫날에는 꽃봉오리 모양으로, 상차림용일 때는 반듯한 정사각으로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은 기계 없이 손으로 진행된다. “손이 많이 가지만, 그래야 연잎이 숨을 쉬고 밥이 편안해져요.”

마지막으로 찜기에 넣고 20~30분간 찐 뒤, 뜸을 들인다. 뜸을 들이는 과정에서 연잎의 향이 밥에 스며든다. 연잎을 벗기면 증기로 인해 눅눅하지 않고, 고슬고슬하면서도 은은한 풀 향이 감도는 밥이 완성된다. “한 송이에 반나절이 들어가요. 밥이 아니라 시간을 먹는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연잎밥을 한 끼가 아닌 하루의 정성으로 만든다.

연잎 위에 찹쌀과 견과류를 정성껏 올려 접는 연잎밥 만들 때 필요한 연잎

연잎밥은 밥상 위의 백제 – 전통의 재현, 현대의 조화

 그녀는 연잎밥을 단순한 건강식이나 사찰음식으로 보지 않는다. “이건 백제의 밥이에요. 조상들이 먹던 방식이에요.” 실제로 부여 지역의 연꽃문화는 백제 사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연잎밥은 사찰 공양식, 제례 음식, 귀족 혼례 때 사용되던 상징적인 의례식 음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장인은 부여 향교, 전통문화 행사, 백제문화제 등에서 연잎밥 시연과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연잎을 만져보고, 밥을 싸보고, 쪄보는 체험을 통해 “향으로 기억하는 음식”을 선물한다. “요즘은 자극적인 맛이 많잖아요. 연잎밥은 혀보다 코가 먼저 기억해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생각나는 거예요.”

그녀는 연잎밥을 현대화하는 작업도 시도하고 있다. 작은 사이즈의 도시락형 연잎밥, 소포장 진공 포장, 냉동 연잎밥 등 바쁜 도시인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변형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 재료와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형태는 바꿔도, 철학은 안 바뀌어요. 밥은 여전히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하니까요.”

그녀의 연잎밥은 식당에서 내는 것이 아니다. 예약을 통해서만 소량으로 제공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많이 만들면 향이 줄어요. 연잎은 사람을 천천히 만나야 하거든요.” 그녀는 음식의 가치가 양이나 가격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기억되는가에 있다고 믿는다.

 

잎을 엮어 마음을 나눈다 – 연잎밥 장인의 오늘과 내일

 그녀는 지금도 연밭 옆 작은 작업장에서 하루에 20~30개 남짓의 연잎밥을 만든다. “더 많이 만들 수도 있죠. 근데 그럼 향이 사라져요. 손이 바빠지면 마음이 좁아지거든요.” 그녀에게 연잎밥은 음식이자 명상이고, 삶의 리듬을 지키는 일이다.

요즘은 딸과 함께 작업을 한다. 젊은 감각으로 SNS 홍보를 하고, 연잎을 활용한 간편식 개발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딸도 말한다. “엄마의 손길이 빠지면 그건 그냥 잡곡밥이에요.” 결국 중요한 건 재료보다 사람이 담는 마음이라는 점을 두 세대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연잎밥을 ‘향기 나는 기록’이라 부른다. 밥상 위에 올려지는 순간, 연잎의 향기와 밥의 온기, 그리고 만든 사람의 시간이 함께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자에도 이름 대신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같은 짧은 손글씨를 넣는다. “먹는다는 건 마음을 나누는 일이잖아요.”

오늘도 부여의 한쪽 연밭 옆, 조용한 주방에서는 연잎이 한 장씩 펼쳐지고, 그 위에 한 줌의 밥과 하루의 정성이 올라간다. 그것은 단순한 전통 음식이 아니라, 잊히지 않을 향과 마음을 품은 백제의 식사 한 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