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청정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물줄기가 흐르고, 해발 고도가 높은 산들이 겹겹이 쌓인 이곳은 사람보다 나무와 흙, 그리고 바람이 먼저 숨 쉬는 땅이다. 그 깊은 산 속에는 사계절 따라 다르게 피어나는 산나물이 자란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나물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삶이고 기록이다.
인제의 한 산골 마을. 30년 넘게 산나물을 채취해온 한 장인이 있다. 그는 나물을 ‘캐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찾는 게 아니에요. 나물이 나를 허락해야 만날 수 있죠.” 그의 말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 그리고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이 글은 단순히 산나물 채취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자연의 흐름과 함께 살아온 기록이자, 사라져가는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의 이야기다.
그가 채취하는 나물은 취나물, 곰취, 참나물, 방풍나물, 산더덕, 어수리, 눈개승마 등 다양하다. 어떤 것은 봄 안개가 걷히기 전 딱 며칠 동안만 돋고, 어떤 것은 여름 초입의 비가 온 뒤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매번 다르고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산나물은 농사가 아니라, 계절과의 대화로 얻는 자연의 선물이다.
인제 산나물을 안다는 것 – 뿌리부터 향까지 익히는 30년의 감각
그는 매해 3월 말이면 산으로 오른다.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아 등산객도 없는 시기, 산의 기운이 바뀌는 순간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다. 그가 찾는 첫 번째 산나물은 ‘어수리’다. 억센 잎 사이로 퍼지는 쌉싸름한 향, 땅을 뚫고 올라온 힘찬 줄기. “이걸 보면 봄이 왔다는 걸 진짜 실감하죠.” 그는 나물마다 향, 잎맥, 줄기 굵기, 뿌리 색깔까지 외운다.
산나물 채취는 단순히 꺾거나 베는 일이 아니다. 뿌리를 해치지 않고, 다시 돋을 수 있도록 위쪽 잎만 일부 채취해야 한다. “산은 빌려 쓰는 곳이에요. 다 베어가면 내년엔 안 나요.” 그는 매해 채취량을 기록하고, 한 해에 한두 번 이상 같은 자리에서 캐지 않는다. 이처럼 그의 산나물은 생태를 해치지 않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채집된다.
채취한 나물은 당일 손질해 저온에서 건조하거나, 소금물에 절여 저장한다. 별다른 조미료나 설탕은 쓰지 않는다. 오직 바람, 물, 그리고 소금만으로 나물의 본연의 맛을 살린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나물도 너무 단맛을 낼라고 해요. 원래 나물은 씁쓸하고 담백한 거예요.” 그는 손질부터 보관까지 모두 ‘자연이 본래 지닌 맛’을 지켜주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또한 산나물의 풍미는 시간에 따라 계속 바뀐다. 그래서 그는 같은 종류라도 어느 계절, 어떤 날, 어떤 시간에 캤느냐에 따라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나물을 다룬다는 것은 단지 ‘채취’가 아니라, 맛의 기억과 계절의 향을 함께 보존하는 일이다.
밥상 위의 자연 – 산나물이 도시의 식탁에 닿기까지
그는 손질한 산나물을 시장에 내다 팔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찾는 단골들만에게 택배로 보낸다. 이유는 단순하다. “손질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시장 가격에 맞추려면 어설프게 손질해야 하거든요. 그럴 바엔 소량이라도 제대로 보낼래요.” 그의 고객 중에는 유기농 식재료를 쓰는 요리사, 위장병을 앓는 환자, 채식 식단을 따르는 수도권 가족 등 다양하다.
산나물은 조리 방식이 까다롭진 않지만, 재료의 상태에 따라 삶는 시간과 간 맞추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래서 그는 나물과 함께 손글씨로 조리법을 적어 보내기도 한다. “이건 오래 삶으세요. 이건 무치지 말고 국 끓이세요.” 그 손글씨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그가 산에서 느낀 나물의 상태를 전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가끔은 손님들이 나물 맛이 다르다고 전화해온다. “작년에 보낸 곰취는 좀 더 진했는데요?” 그는 웃으며 말한다. “비 온 다음 날 캤거든요. 그래서 그랬을 거예요.” 같은 곰취라도 해마다, 매일, 기온과 비, 채취 시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그래서 그의 나물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과 달리, 매번 새로운 맛을 가진 맛좋은 음식’이 된다.
그는 산나물이 단순히 반찬거리가 아니라, 밥상 위에 계절을 올리는 행위라고 말한다. “봄이면 봄 맛이 나야 하고, 여름엔 여름 향이 나야죠. 나물은 그렇게 우리 몸도 계절에 맞춰주는 음식이에요.” 이 철학은 그의 산나물에 담긴 가장 진한 양념이다.
자연을 채취하지 않고 기억하는 법
그는 요즘 나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손글씨로 쓴 채취일지, 산 위치, 그날 날씨, 나물의 향과 감촉까지 적는다. “내가 기억해도, 나중엔 잊을까 봐요. 이 맛을 누군가는 계속 이어줬으면 해서요.” 그는 자신이 떠난 후에도 누군가 이 기록을 보고 계절 따라 산으로 향하길 바란다.
자녀들은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며 살고 있지만, 그 중 막내가 가끔 함께 산에 오른다. “아직 나물 캐는 기술은 없어도, 산에선 조용히 걷는 법은 배웠어요.” 그는 말한다. 그렇게라도 산을 느끼고 기억하면 언젠가는 나물의 가치를 알게 될 거라고 믿는다. 그의 바람은 단지 기술 전수가 아니라, 자연을 대하는 마음을 남기는 일이다.
그는 앞으로도 산나물을 대량으로 생산할 생각은 없다. 더 많은 사람에게 팔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나물’을 맛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 마음이 있기에 그의 나물은 매년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작은 박스에 담겨 누군가의 식탁 위로 전해진다.
인제의 깊은 산 속에서 오늘도 그는 한 잎 한 잎 나물을 캐며, 뿌리와 잎 사이의 향기를 기억한다. 그것은 단지 채취가 아니라, 계절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고, 우리가 잊고 있던 자연의 속도에 귀 기울이는 방식이다. 오늘도 한 사람의 손끝에서, 강원의 향기가 오늘도 조용히 퍼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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