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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포천 석공 예술가, 돌 위에 새긴 마을의 기억

포천 작업장에서 정과 망치로 화강암을 조각 중인 석공 장인

 경기도 포천은 석재 산업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의 산과 강이 품은 단단한 화강암은 오래전부터 무덤, 기념비, 석불, 석탑, 담장 등 우리 일상의 한 켠을 구성해왔다. 그러나 그 돌들을 ‘산업’이 아닌 ‘기록의 재료’로 다루는 사람이 있다. 40년 넘게 망치와 정으로 마을의 이야기와 이름 없는 시간을 새겨온 한 석공 예술가.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돌을 쪼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서 나오는 조형물에는 단순한 조각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묘비 뒤편의 작은 글자, 마을 어귀에 놓인 돌기둥, 공원의 조형물 하나에도 이 지역의 과거와 사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의 기억은 흐르지만, 돌은 남아요. 그래서 누군가는 그 위에 새겨둬야 하죠.”

이 글은 단순히 돌을 다듬는 기술을 소개하는 게 아니다. 돌이라는 가장 무겁고, 느리고, 차가운 재료에 사람의 이야기와 마을의 시간, 삶의 흔적을 새기는 한 장인의 기록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마을의 어느 모퉁이에 조용히 서 있는 그의 작업들, 그 속에 담긴 삶의 온기를 따라가 본다.

 

포천 석공 예술가가 돌을 깬다는 것은, 시간을 여는 일

 그의 하루는 여전히 이른 아침, 차가운 돌을 만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포천 인근 채석장에서 가져온 화강암 덩어리를 작업장 한 켠에 세워두고, 정과 망치로 표면을 쳐내며 형태를 잡아간다. 거친 면을 다듬기까지 최소 며칠, 조형의 기본 틀을 잡는 데만 수십 시간이 걸린다. “돌은 밀어붙이면 부러져요. 조심히 설득해야 해요.” 그의 말처럼 돌과의 작업은 물리적인 힘보다 시간과 감각의 싸움이다.

가장 먼저 돌의 결을 읽는다. 돌은 나무처럼 결이 있고, 그 결을 무시하면 쉽게 깨진다. 그래서 그는 작업 전 돌의 무게와 습기, 결 방향을 손과 소리로 점검한다. 가만히 두드리면 그 돌의 속살이 어디까지 단단한지, 어디가 약한지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돌은 살아 있어요. 속이 균일하지 않아서 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줘요.”라고 말한다.

문자를 새기는 작업은 더 섬세하다. 요즘은 기계로도 조각이 가능하지만, 그는 여전히 손으로 한 자 한 자 정으로 새긴다. 글자체도 전통 한자체부터 흘림체까지 다양하게 소화한다. 특히 가족묘의 비석에 들어가는 이름은 최대한 고요하고 단정하게 새긴다. “이름을 새긴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을 하나로 묶는 일이에요. 그만큼 조심스럽고 단단하게 남겨야 하죠.”

그는 돌을 깬다기보다, 돌을 연다고 말한다. 겉에서 보면 단단하고 무정한 돌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결과 색을 꺼내려면 사람의 기다림과 정성이 먼저 필요하다. 돌은 말을 하지 않지만, 제대로 만지면 그 안에 담긴 시간이 느껴진다.

 

마을과 함께한 조형물, 사라지지 않는 공동체의 기록

 그의 작업은 개인 의뢰뿐 아니라 마을과 관련된 것들도 많다. 동네 어귀에 세운 마을 이름석, 복원된 정자 앞의 설명석, 오래된 나무 아래 놓인 기념비. 그는 단순히 글씨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가 지닌 역사와 사연을 조사하고 듣고 묻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이 돌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 아무리 잘 새겨도 의미가 없어요.”

실제로 그는 마을 어르신들과 수차례 대화를 나눈 뒤 글귀 하나를 새긴 적도 있다. 그 돌은 지금도 마을 입구에 서서, 방문객들에게 조용히 이곳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말한다. “책은 없어지지만, 돌은 무너지지 않아요. 세월을 지나도 누군가는 다시 그걸 보고, 그 안에 담긴 사람을 기억하겠죠.”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지역 중학교와 연계해 ‘돌 글씨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정과 망치를 쥐게 하고, 자신의 이름이나 가족 이름 한 자를 직접 돌에 새기게 한다. 아이들은 처음엔 지루해하지만, 막상 자기 손으로 돌에 글씨를 새기면 신기함과 감동을 함께 느낀다. 그 체험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기록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돌이 단지 무덤의 상징이나 차가운 조형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흔적을 담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돌은 오래 남잖아요. 마을도, 가족도, 그 안에 있던 이름들도 오래도록 남겨야 해요.”

 

돌로 남긴 삶,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느린 기술 

 그는 이제 칠순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하루도 빠짐없이 작업장에 나간다. 가끔은 의뢰가 없어도, 돌을 만지고 글자를 연습한다. “손이 멈추면 마음도 굳어요.” 그는 말한다. 요즘은 장비가 좋아져 작업이 쉬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정과 망치라는 전통 도구를 고집한다. 그래야 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건축 일을 하고 있어 이 작업을 잇진 못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마을 청년들에게도 틈날 때마다 기술을 알려준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건, 마음이에요. 그 마음을 새기는 법을 누군가는 배워야 해요.” 그의 소망은 간단하다. “내가 없어진 뒤에도, 누군가 이 마을의 이름을 새겨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업장 한쪽에는 그가 만든 작은 돌 조각들이 있다. ‘생각’, ‘기억’, ‘마을’, ‘고향’ 같은 단어가 새겨진 이 돌 조각들은 누구에게 팔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돌을 깰 때마다 남는 자투리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새기고 마음을 다스리는 용도로 만든다. “돌에 새긴 글은 쉽게 지워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쓰게 돼요.”

그는 돌을 통해 사람과 시간을 잇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묘비에 새긴 이름은 남은 가족의 마음을 붙들고, 마을 입구의 표석은 길을 잃지 않게 해주며, 공원에 놓인 기념석은 지역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보이지 않는 길잡이”라고 말한다. 말은 없지만, 돌은 늘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을 한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돌도 준비해두었다. 본인의 이름, 출생년도, 간단한 문구를 새긴 작은 석비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남기고 싶었던 말이 담긴 돌이다. “돌이 오래 남으니까, 내가 없어져도 그 말은 남겠지요.” 그는 이렇게 조용히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도 준비하고 있었다.

요즘 그는 인근 초등학교와 연계해 ‘우리 마을 돌새기기’라는 프로그램도 시범 운영 중이다. 아이들은 마을의 이름, 가족 이름, 그리고 스스로 정한 단어를 돌 위에 새긴다. 그는 아이들에게 정과 망치를 쥐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건 세게 내리치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도구야.”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금세 집중한다. 이 작은 경험이 언젠가 그들에게 돌과 사람, 기억의 관계를 새롭게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그는 바란다.

오늘도 포천의 한 작업장에선 느리지만 단단한 망치질 소리가 울린다. 돌은 말이 없지만, 그 위에 새겨진 글자와 문양, 기울기 속에는 사람의 손길과 삶의 무게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가 남긴 돌 하나하나는 단지 조형물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지냈던 마을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다시 누군가에게 삶의 이야기를 건네주는 조용한 목소리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앞으로도 돌을 매개로 계속 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