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은 오래전부터 대나무의 고장으로 불렸다. 담양천을 따라 이어지는 죽녹원 숲길은 수많은 이들에게 휴식의 공간이 되었고, 그 뿌리 깊은 대나무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이곳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자산으로 남아 있다. 대나무는 담양의 풍경을 이루는 나무가 아니라, 시간과 손끝의 결을 담는 전통 그 자체다.
이 조용한 동네의 골목 안쪽, 오래된 기와집 한 채를 개조한 작업장에선 매일같이 결들을 다듬는 사람이 존재한다. 40년 넘게 오직 대나무만을 만져온 공예 장인.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나무를 깎고, 삶고, 말리고, 다시 깎는 동안 그는 스스로를 감추고 나무의 결을 드러낸다. “대나무는 무겁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죠.” 그의 말은 짧지만 단단하다.
이 글은 대나무라는 재료가 가진 고유한 결과 감정, 그리고 그것을 오롯이 이어오고 있는 한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선(線)의 미학을 다룬 이야기다. 단순한 제품이 아닌, 삶의 태도와 철학으로 만들어진 공예가 어떻게 현대의 일상에 닿는 예술이 되는지를 함께 들여다본다.
담양 대나무를 자르고 삶고 깎는, 단순하지만 반복되지 않는 일
대나무 공예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는 대나무를 자르는 순간부터 공예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대나무는 절단면 하나에도 섬세한 결이 다르다. 그리고 그 결을 무시하고 무작정 가공하면, 대나무는 금세 갈라지거나 휘어진다. “사람도 성질이 다르듯, 대나무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그걸 먼저 읽어야 해요.”
담양의 기후는 대나무가 자라기에 적당하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물이 풍부하며, 습도도 적당하다. 그는 매년 6월이 되면 산속에서 직접 대나무를 채취한다. 너무 얇지도, 너무 굵지도 않은 중간 굵기의 대나무를 고르고, 뿌리부터 끝까지 쭉 결을 확인한 후에야 베어낸다. 이후 삶는 과정이 이어진다. 대나무를 삶는 이유는 수분을 조절하고 곰팡이 방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무의 긴장을 풀어주는 행위다. "대나무도 삶아야 말이 잘 통해요."
삶은 대나무는 자연광 아래에서 최소 한 달 이상 건조시킨다. 이 과정에서 갈라지는 것이 있으면 다시 빼고, 그중에서도 가장 고른 결을 가진 대나무만을 공예용으로 쓴다. 이후 작업장으로 옮겨진 대나무는 가느다랗게 쪼개지고, 날카로운 대패와 손칼로 다듬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진행된다. “기계는 모양을 만들지만, 감정은 못 만들어요.” 그의 말처럼, 공예는 속도를 포기하고 감각을 선택한 결과물이다.
대나무를 넘어서 마음을 담는 공예
대나무 공예 장인인 그의 작업장에는 제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대나무 찻상, 죽세공 바구니, 다기함, 전통 부채, 찻잎 저장함, 벽걸이 소품 등.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걸 “생활에 쓰이는 마음의 그릇”이라 표현한다. “물건이지만, 감정이 들어가면 오래 남아요. 대나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뀌고, 손때가 묻어요. 그걸 예쁘게 여길 수 있어야 해요.”
그는 현대인의 삶에 맞게 전통 공예를 재해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찻잔 받침 하나에도 접이식 구조를 더하고, 벽걸이 소품에는 LED 조명을 달아 현대적 기능을 가미한다. 그러나 본질은 바꾸지 않는다. 재료는 전부 담양산 대나무, 제작은 100% 수작업이다. 전통을 버리지 않고도 현대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그의 공예품을 보고 감탄한다. 일본, 대만, 프랑스, 독일에서 온 이들이 그의 작업장을 직접 방문해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그들은 대나무의 결이 가지는 조용한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다. “요즘은 시끄러운 게 너무 많아서, 대나무처럼 조용한 재료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대요.” 그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최근엔 젊은 공예가들과의 협업도 활발하다. 그는 후계자 교육을 위해 매주 두 차례 도제식 수업을 연다. 단순히 기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보는 눈, 손에 남는 온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을 따라가는 태도”를 전한다. 기술보다 철학을 전하는 사람, 그가 지금 담양에서 이어가고 있는 일이다.
사라지지 않아야 할 결, 남겨야 할 손의 온기
“요즘은 뭐든 빨리 만들고 빨리 쓰고 버리잖아요. 대나무는 그 반대예요. 천천히 자라고, 오래 쓸수록 가치가 생기죠.” 그는 공예가 단순한 전통의 보존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더 필요한 ‘속도의 균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손맛을 잊었고, 기다림을 잊었고, 재료의 목소리를 듣는 법도 잊었다. 대나무는 그걸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의 작업장은 조용하지만 늘 바쁘다. 하나의 찻상이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두 달이 걸리고, 그마저도 중간에 갈라지거나 변형되면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 그래서 그의 공예품에는 ‘작품 번호’도 ‘브랜드’도 없다. 오직 완성된 형태와 사용자 손에 남는 감촉만이 있다. “쓸수록 손에 익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예뻐지죠. 대나무는 버티는 재료예요.”
그는 요즘 작업장을 조금 더 개방하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 대나무 공예 전시, 죽세공 체험교실 등. “이걸 지키려면, 알려야죠.” 전통은 혼자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익혀야 오래 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대나무를 깎는 일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결’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나무는 조용하다. 화려하지 않고,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인간의 손과 마음을 가장 정직하게 담을 수 있는 재료다. 담양의 이 조용한 작업장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결국 삶의 조각이다. 그리고 그 삶은 우리 일상 속에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녹아든다. 지금도 그는 한 자루 대나무를 들고, 다음 작품을 위한 결을 읽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진짜 장인이 걷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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