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의성은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마늘 주산지다. 알이 굵고 단단하며 매운맛이 강한 의성 마늘은, 고기와 함께 먹는 쌈장 마늘부터, 된장찌개, 김치, 그리고 약재까지 수많은 식문화의 바탕을 이뤄왔다. 마늘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다. 한국인의 입맛을 떠받치는 '기초 맛'이며, 동시에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자라야 하는 인내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의성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30년 넘게 전통 방식으로 마늘을 재배해온 한 장인이 있다. 그는 말한다. “마늘은 사람을 닮았어요. 겉보다 속이 중요하니까요.” 이 글은 마늘을 단순한 작물이 아닌 한 장인의 철학과 계절, 땀과 기억이 응축된 생명체로 바라보는 이야기다.
의성 마늘은 흙이 키운다 – 땅을 준비하는 마음부터 시작되는 농사
의성 마늘 장인의 하루는 가을에서 시작된다. 마늘은 겨울을 나야 제대로 자라기 때문에, 10월 초부터 밭을 갈고 흙을 뒤집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는 마늘 재배에서 가장 중요한 건 ‘흙의 상태’라고 말한다. “비료보다도 땅이 좋아야 마늘이 안 병들어요. 흙이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게 먼저예요.”
그는 화학비료를 거의 쓰지 않는다. 볏짚, 깻묵, 쌀겨, 유박 등 천연 자재를 발효시켜 만든 유기농 퇴비를 사용해 토양을 만든다. 밭을 고른 다음, 마늘씨를 심는 고랑을 정리하고 흑마늘용과 생마늘용으로 구분해 심는다. “흙이 너무 차가우면 안 돼요. 적당히 숨이 있어야 마늘이 뿌리를 내리죠.”
마늘은 심은 다음 최소 6개월 이상 땅속에서 자란다. 겨울을 뚫고 이듬해 봄까지 기다려야 수확이 가능하다. 그는 말한다. “마늘 농사는 재촉이 안 돼요. 너무 빨리 캐면 물이 많고, 너무 늦으면 썩어요. 적당한 때를 아는 게 농부의 감각이죠.” 마늘을 재배한다는 것은 단지 작물을 심는 게 아니라, 계절과 리듬에 몸을 맞추는 일이다.
그의 밭은 항상 정갈하게 정리돼 있다. 흙을 발로 밟지 않고, 고랑은 물 빠짐을 계산해 정비되어 있다. 모든 작업은 손과 호미, 삽만으로 이루어진다. 기계를 쓰면 더 빠를 수 있지만, 그는 흙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느림을 택한다고 말한다. “흙이 건강해야, 마늘이 사람 몸을 건강하게 해주죠.”
마늘은 감으로 다룬다 – 수확의 타이밍과 손끝의 기술
5월 말에서 6월 초, 의성 마늘 수확철이 다가오면 장인의 하루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아직 해가 뜨기 전, 땅의 수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시간에 마늘을 뽑는다. 마늘 수확은 절대 기계로 하지 않는다. 한 송이 한 송이 손으로 흙을 털고, 뿌리와 줄기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수확한다.
그는 마늘의 뿌리를 절대 자르지 않는다. “뿌리가 말라야 마늘이 숨이 죽어요. 살아 있는 상태에서 수확하면, 오히려 보관이 오래돼요.” 그는 수확한 마늘을 줄기째 엮어 바람이 잘 드는 창고에 매달아 말린다. 건조 기간은 보통 2주에서 3주 사이. 그 동안 마늘은 껍질이 단단해지고, 속살이 응축되면서 맛이 깊어진다.
마늘의 크기나 겉모양보다 그는 냄새와 무게, 질감으로 품질을 판단한다. “무거우면서도 눌렀을 때 단단한 게 최고죠. 겉만 크고 속이 물렁한 건 좋은 마늘이 아니에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마늘을 쥔 손으로 몇 번 돌려보고는, 속을 가르지 않고도 좋은 품질인지 알아낸다.
마늘을 수확한 뒤, 그는 품종별로 선별해 놓는다. 흑마늘용, 통마늘용, 절임용, 종자용 등 목적에 따라 보관 방식과 시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똑같이 보이는 마늘도 쓸모가 다 달라요. 사람도 그렇잖아요. 마늘도 제자리에서 빛을 내야 해요.” 그의 말에는 오랜 시간 마늘과 함께하며 느낀 존중의 태도가 담겨 있다.
뿌리를 상품으로 만들기까지 – 정직한 유통과 신뢰의 시간
그는 마늘을 중간상에 넘기지 않는다. 직접 선별하고, 포장하고, 택배까지 손으로 한다. “한 번에 많이 팔 생각은 없어요. 제대로 된 마늘을 아는 사람에게 가는 게 더 중요해요.” 실제로 그의 고객은 대부분 단골이다. 수년째 마늘을 구입해 요리, 약용, 선물로 사용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그는 마늘 상자를 보낼 때, 작은 쪽마늘이나 마늘껍질을 덤으로 함께 넣는다. “껍질로 육수 내면 좋아요.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죠.” 이 작은 정성은 고객과의 신뢰를 쌓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된다. 그래서 그의 마늘은 광고 없이도 매년 완판된다. 그가 파는 것은 단지 뿌리 식재료가 아니라, 정성과 신뢰, 그리고 한 해의 기후와 땀의 결과다.
최근에는 흑마늘도 직접 만든다.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2주 이상 숙성시키는 작업이다. “마늘이 곪는 게 아니라, 속에서 응축돼야 해요. 잘못하면 쓴맛만 나요.” 그는 흑마늘 제조에도 기계보다는 작은 항아리를 이용한다. 숙성 중 마늘이 내는 냄새, 수분량, 껍질 색을 보며 익힘 정도를 감별한다.
그의 흑마늘은 농촌진흥청 인증을 받은 제품은 아니지만, 식탁에 올리면 다시 찾게 되는 맛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마늘을 기르고, 다듬고, 숙성시키는 모든 과정에 사람의 손과 시간, 감각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 맛은 결국 한 해를 통째로 압축한 결과물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뿌리 농사 – 기억과 기술을 함께 잇다
그는 올해로 마늘 농사 35년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기후도 바뀌고, 품종도 달라졌지만 사람의 손으로 지켜야 할 농사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특히 마늘처럼 뿌리를 키우는 농사는 쉽게 기계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흙, 날씨, 수분, 해충, 숙성 타이밍 등 오감으로 알아채야 하는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요즘 그는 마늘 농사를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기 위해 마을 청년들과 함께 작은 마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정식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계절마다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심고, 수확하고, 보관까지 함께하는 실습 중심의 전수 방식이다. 그는 말한다. “농사는 기술이 아니라 몸의 기억이에요. 몸이 기억해야 진짜예요.”
그의 딸은 도시에 살다가 최근 귀농했다. 아직 아버지처럼 마늘을 키우지는 않지만, 수확철이면 함께 밭일을 돕고, 흑마늘 포장을 도맡는다. “이 일은 단순해 보여도, 마음이 안 담기면 바로 표가 나요.” 그녀의 말은 마늘 농사의 본질을 정확히 짚는다. 정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과로 드러난다.
그는 마늘 한 송이를 들고 말한다. “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계절, 날씨, 내 손, 내 가족, 땅, 기다림. 이게 그냥 양념으로 끝날 수 없는 이유예요.” 오늘도 의성의 밭 한가운데, 그는 뿌리를 닦고, 마늘을 묶고, 흙을 다시 갈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생명을 품은 순환의 노동이자 뿌리 깊은 생애의 기록이다.
'장인을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안 홍삼 장인, 뿌리 깊은 산삼의 시간을 찌다 (0) | 2025.07.04 |
---|---|
포천 석공 예술가, 돌 위에 새긴 마을의 기억 (0) | 2025.07.04 |
장흥 표고버섯 장인, 나무와 습기 속에서 자란 고요한 식감 (0) | 2025.07.03 |
인제 산나물 장인, 계절 따라 캐낸 강원의 향기 (0) | 2025.07.03 |
예천 한지 장인, 닥나무 껍질로 이어가는 천 년의 기록 (0) | 2025.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