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진안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인삼 산지다. 해발 고도가 높고 일교차가 커, 뿌리가 단단하고 향이 진한 인삼이 자란다. 그중에서도 찌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 만든 홍삼은 인삼보다 강한 농축된 힘을 갖고 있어, 예로부터 귀한 약재로 취급됐다. 그러나 이 홍삼을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드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다. 진안 외곽 산중에서 40년 넘게 직접 인삼을 재배하고 찌고 말리며 홍삼을 빚어내는 장인이 있다. 그는 말한다. “홍삼은 삶는 게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우려내는 거예요.” 이 글은 단순한 건강식품을 넘어, 뿌리의 시간을 사람의 손으로 농축시켜온 한 장인의 이야기다.
인삼은 흙이 키우고, 기다림이 완성한다
진안 홍삼 장인은 해발 400미터가 넘는 밭에서 인삼을 기른다. 인삼은 보통 6년을 키운다. 그 이상은 병충해나 뿌리 썩음의 위험이 커져 상품성이 떨어진다. “6년이면 사람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간이죠. 그만큼 오래 보고 키워야 해요.”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인삼은 재배 기간이 긴 만큼 흙과 사람의 노력이 많이 필요한 작물이다.
그는 인삼을 심기 전 1년 이상 밭을 준비한다. 나무껍질, 낙엽, 볏짚 등을 썩혀 만든 천연 퇴비를 써서 흙을 살린다. “비료는 쉽게 열매를 맺게 하지만, 인삼은 쉽게 키우면 쉽게 무너져요. 뿌리 식물은 흙의 깊이를 닮아야죠.”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쳐야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진다고 그는 강조한다.
인삼은 매년 관리가 중요하다. 봄에는 순을 키우고, 여름에는 그늘을 만들어주며, 장마철에는 물 빠짐을 신경 써야 한다. 그는 날마다 인삼 잎의 색을 관찰하고, 줄기의 각도를 기록한다. “잎이 위를 보느냐, 아래를 보느냐로도 뿌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어요.” 그의 말은 마치 식물을 키우는 게 아니라 식물과 대화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는 인삼을 뽑을 때도 손으로 조심스럽게 캐낸다. “포크레인으로 다 뽑으면 편하긴 한데, 그렇게 하면 뿌리가 상하죠.” 흙속에서 여섯 해를 버틴 뿌리를 꺼내는 그 순간, 그는 땅과 자신이 함께 길러낸 생명을 꺼내는 감정으로 작업한다.
찌는 게 아니라 익히는 것 – 전통 홍삼 제조의 내밀한 과정
인삼을 홍삼으로 만들기 위해선 보통 3단계를 거친다. 세척 → 찌기 → 건조. 하지만 이 장인은 이 과정을 더디게, 그리고 다르게 한다. 먼저 세척은 물로만 한다. 세제나 산 처리는 일절 하지 않는다. “진짜 홍삼은 흙냄새가 있어야 돼요. 다 씻어내면 남는 게 없어요.” 가장 중요한 ‘찌기’ 단계에서는 전통 가마솥을 사용한다. 현대식 증기압력솥보다 온도가 낮고, 증기 분산이 자연스럽다. 그는 12시간 이상 낮은 온도로 천천히 찌고, 그 후 열기가 남은 채 자연스럽게 식도록 두어 1차 숙성을 유도한다. “인삼이 뜨거움에 겁먹지 않게 해야 돼요. 그래야 단맛이 안 타고 안에서부터 익어요.”
이후 건조는 항아리식 황토방에서 진행된다. 건조기는 쓰지 않는다. “건조기를 쓰면 모양은 예쁜데, 안이 비어요. 껍질만 바삭하고 속은 힘이 없죠.” 그는 대신 바람과 온도, 습도를 손으로 조절하면서, 7~10일에 걸쳐 천천히 말린다. 이 과정이 끝난 홍삼은 색이 붉고, 향이 고요하게 퍼진다.
그는 말한다. “홍삼은 생김새보다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이 중요해요. 무게, 끈적임, 눌림감. 그게 잘 익은 홍삼이에요.” 그는 한 뿌리 한 뿌리를 만져보며 완성도를 판단한다. 상품 홍삼은 크기와 형태로 평가하지만, 그는 손의 감각으로 품질을 결정한다.
홍삼은 약이 아니라 삶이다 – 건강보다 진심을 파는 마음
그는 자신이 만든 홍삼을 ‘약’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이건 건강기능식품이 아니라, 땅이 준 시간을 압축한 거예요.” 그는 홍삼을 팔면서 제품 설명서보다 뿌리의 기운과 계절의 흐름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직접 판매만 한다. 인터넷 쇼핑몰도, 마켓도 없다. 마을에 놀러온 손님이나, 입소문을 들은 단골만이 그의 홍삼을 만난다. 고객에게는 단순히 제품을 보내지 않고, 한 해 인삼 농사의 날씨 기록, 뿌리 사진, 찌는 과정의 설명을 함께 담아 보낸다. “어디서 자랐는지를 알면, 그걸 먹는 사람도 달라져요.”
그는 가끔 홍삼을 사려는 고객에게 되묻는다. “이거 그냥 기운 내려고 드시는 거예요? 아니면 감기 예방하려고요?” 그 질문엔 농부의 따뜻함과 동시에, 자연의 속도를 느끼며 살아온 사람의 진심이 있다. 그는 홍삼을 하루 3번 먹으라 권하지 않는다. “먹고 나서,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먼저 느껴보라”고 한다.
홍삼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건 아니라고도 말한다. “몸이 너무 열이 많거나, 체질이 맞지 않으면 홍삼도 부담이 되죠. 그래서 저는 한 번쯤 몸을 살펴보고 권해요.” 이처럼 그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삶을 함께 걱정하는 장인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뿌리 농사 – 남기는 건 기술보다 태도
그의 농장을 찾는 젊은 사람들도 늘었다. 인삼을 배우고 싶다기보다는, 자연과 가까운 삶을 경험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그런 방문자들에게 “홍삼 만드는 법보다, 홍삼을 대하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고 말한다. “이건 속도를 내면 안 돼요. 식물보다 사람이 먼저 조급하면 다 망쳐요.”
그는 기술을 문서화하기보다, 함께 살아보며 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몇몇 젊은 부부와 귀농 희망자들이 그와 함께 계절을 보내며, 인삼 밭을 정리하고 찌고 말리는 작업을 함께했다. 그중 한 부부는 아예 진안에 정착해 작은 홍삼 공방을 열기도 했다.
그는 말한다. “내가 이걸 꼭 내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누가 하든, 이 방식과 태도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되는 거죠.” 홍삼이 단순히 전통 제품이 아니라, 사람과 땅이 함께 사는 방식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오늘도 진안 산속 작은 공방에서는 은은한 인삼향이 퍼지고 있다. 항아리 속에서 천천히 증기 오르는 가마솥 옆에선, 한 장인이 뿌리 하나를 손에 쥐고 익음의 상태를 가늠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뿌리에 담긴 시간, 손끝에 쌓인 철학, 그리고 삶을 건강하게 이어가고 싶은 사람의 진심이 고요히 끓고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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