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유명한 이 고장에는 외지인이 잘 모르는 숨은 식당이 하나 있다. 읍내 시장을 지나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이 장칼국수집은 40년이 넘도록 오직 ‘장칼국수’ 하나만을 끓여온 집이다. 식당 간판에는 오래된 페인트가 벗겨졌고, 메뉴판도 바래 있지만, 매일 아침 문을 열자마자 줄이 서기 시작한다.
이 집을 지켜온 이는 올해로 일흔이 넘은 한 어머니. 그가 처음 장칼국수를 끓이기 시작한 건 남편을 잃고 세 아이를 키우던 시절이었다. 당장 식구들 입에 들어갈 반찬이 없어, 된장과 고추장을 푼 국물에 밀가루 반죽을 풀어 끓여낸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뭐라도 끓여야 했어요. 그래야 아이들 밥을 먹었으니까요." 그 한 그릇은 그렇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이후 시장 사람들의 입맛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이 글은 단순히 맛집 소개가 아니다. 한 여인의 인생과, 지역의 식문화, 그리고 한국인의 밥상 깊숙이 자리한 ‘장’이라는 재료의 의미를 조명하는 기록이다. 어머니의 손맛이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는지, 그 뜨거운 한 그릇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밀가루 반죽부터 국물까지 – 느린 시간으로 완성된 맛
이 집 장칼국수의 시작은 반죽이다. 하루 전날 밤, 중력분 밀가루에 소금을 섞고 미지근한 물을 넣어 손으로 치대기 시작한다. 기계 반죽이 아니라 손으로 눌렀다 당기기를 반복하는 작업이다. 한 시간 이상 치댄 반죽은 면포에 싸서 하룻밤 숙성시킨다. 그래야 삶았을 때 면발이 퍼지지 않고 쫄깃한 식감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숙성된 반죽을 꺼내어 손으로 밀고 칼로 썬다. 손칼국수답게 면발은 일정하지 않고 두께가 제각각이다. 그 자체로 집밥 같은 느낌을 준다. "너무 고르면 재미없어요. 국물도, 면도, 좀 울퉁불퉁해야 맛이 살아나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침 해도 뜨기 전부터 칼질을 시작한다.
국물의 핵심은 집에서 담근 된장과 고추장이다. 마늘, 양파, 들깻가루, 애호박, 감자, 대파 등 기본 재료가 들어가지만, 맛의 중심은 장에서 결정된다. "된장은 3년 묵은 걸 써요. 너무 진하면 텁텁하고, 고추장은 단맛이 돌면 안 되고요. 칼국수는 맵기보다 진해야 해요."
끓는 국물에 칼국수를 넣으면 고추장의 붉은빛이 퍼지며 칼칼한 향이 퍼진다. 여기에 들깨를 풀어 고소함을 더하고, 마지막에 얹는 생김가루와 다진 마늘이 깊이를 더한다. 이 국물은 처음 한 숟갈은 맵게 느껴지지만, 먹을수록 속이 편안해지고, 입 안에는 장의 감칠맛이 오래 남는다.
손님이 아니라 식구처럼 – 밥을 파는 마음의 태도
이 집에는 따로 종업원이 없다. 주인 어머니와 둘째 딸이 함께 일한다. 손님이 몰리는 점심시간에도 음식을 내는 속도는 빠르지 않다. "밥은 빨리 준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손님도 국물 끓는 냄새 맡으며 기다려야, 한 숟갈에 감사한 줄 알아요." 그 말은 음식에 대한 태도이자,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손님 중에는 30년 넘게 단골인 이도 있다. 군대 갔다가 돌아오면 이 집부터 찾는 청년, 도시에서 부모님 모시고 내려온 딸, 그리고 고향에 잠시 들른 노인들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이 집 국물은 잊히지 않아요." 어머니는 손님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떤 국물 농도를 좋아하는지, 들깨를 넣는지 빼는지는 다 안다. "자주 오는 사람은, 식구잖아요."
그녀는 매일 정오 무렵이면 자신이 끓인 장칼국수 한 그릇을 직접 먹는다. 반찬은 없다. 국물에 밥을 말아 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내가 먹기 싫은 건 남도 못 먹게 해야죠." 장칼국수를 먹고 있으면, 고추장보다 된장 맛이 먼저 올라온다. 맵지 않지만 진하고, 강하지 않지만 속이 든든하다.
어머니는 식당 구석에 걸린 오래된 사진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게 이 가게 처음 시작할 때예요. 아이 셋 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손자도 와서 먹고 가요.” 그렇게 장칼국수는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단지 한 끼의 음식이 아니라, 기억과 가족, 공동체의 연결이 되는 음식으로.
사라져가는 손맛, 그러나 잊히지 않아야 할 식탁의 기억
요즘은 프랜차이즈 칼국수집이 많고, 즉석면으로 만든 칼국수도 흔하다. 국물은 사골베이스, 면은 공장에서 만든 반죽이다. 반면 이 집의 장칼국수는 하루에 50그릇 이상 팔지 않는다. 미리 만들어 놓는 양이 정해져 있고, 소진되면 가게 문을 닫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이상은 손으로 못 해요. 손맛은 한계가 있어요."
딸은 요리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어머니 곁에서 반죽과 국물 끓이는 법을 배웠다. “하루하루는 고되지만, 매일 같은 면을 써는 이 반복이 나쁘지 않아요. 손끝에서 엄마의 방식이 따라 나오는 게 신기하죠.” 딸은 언젠가 가게를 이어받을 생각이다. 대신 공간은 그대로 두고, 간판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이 집은 엄마 이름이니까요.”
장칼국수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방식으로, 같은 그릇에 담겨 나오기 때문에 특별해진다. 그것은 단지 국수의 맛이 아니라, 한 가정이 세월을 견딘 방식이고, 동네가 기억하는 온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음식은 쉽게 바뀌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제 청송의 이 장칼국수집은 작은 명소가 되었다. 관광객이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고,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같은 손맛으로 국물을 끓인다. 그리고 그 한 그릇 속에, 그녀가 지나온 시간과 이 동네가 견뎌온 사계절이 조용히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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