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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대구 약령시 전통 한약방 주인, 현대인에게 맞춘 한방 철학

 대구 중구에 위치한 ‘약령시(藥令市)’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약재 시장이다. 3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시장은 지금도 골목골목마다 한약 냄새가 진하게 밴 곳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심 속에서도 이곳만큼은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약재 상점과 한약방들이 모여 있고, 상인들의 말투도 구수하다. 이곳의 한 약방을 40년 넘게 지켜온 한 노약사는 여전히 매일 아침 6시면 문을 연다.

그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사람의 몸은 자연의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의 약방에는 현대식 인테리어도, 자동화 시스템도 없다. 다만 책장 가득 한약 고서와, 벽에 걸린 수백 가지 약초 표본, 그리고 오래된 손 저울과 도마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람을 직접 만나는 시간’이다. “약은 몸이 아니라 삶 전체를 살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한의학을 향한 철학이 깃들어 있다.

이 글은 약령시 한복판에서 지금도 전통을 지켜가는 한 한약방 주인의 이야기다. 단순한 민간요법 소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람 중심의 치료법’과 한방 철학의 본질을 다룬 기록이다. 그리고 그 철학이 어떻게 현대인의 건강과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한다.

 

진료는 대화에서 시작된다 – 한 사람의 삶을 보는 한방의 시선

 이 약방은 병원처럼 진료 차트가 따로 없다. 대신 손님이 들어오면 먼저 차 한 잔을 내어주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10분이면 끝나는 진료가 아닌, 30분에서 1시간이 걸릴 때도 많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자고,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들어야 그 사람 몸의 균형이 보입니다.” 그는 사람의 말투와 표정, 걸음걸이까지도 진단의 일부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자주 찾는 단골들의 생활 패턴까지 기억하고 있다. 한 50대 여성 고객이 소화불량으로 왔을 때, 그는 약보다는 ‘잠자는 시간’을 먼저 물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로 인한 수면장애가 문제였고, 소화기 약보다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한방차를 권했다. 일주일 후 그 고객은 약을 쓰지 않고도 증상이 사라졌다. 이렇듯 이 약방의 진료는 문제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한방에서는 ‘기혈(氣血)의 흐름’을 중요하게 본다. 그는 사람마다 기운이 머무는 자리가 다르며, 똑같은 증상이라도 그 원인이 전혀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렸더라도 어떤 이는 열이 많아서 땀을 내야 하고, 어떤 이는 체력이 떨어져 따뜻하게 기운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걸 구분하지 않으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됩니다.”라는 말은 그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신념이다.

진료실에는 화려한 기기 하나 없지만, 대신 사람을 보는 깊은 눈과 듣는 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약방이 오랜 세월 동안 신뢰를 받아온 이유다. 이곳에서는 약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에 있다.

대구 전통 한약방, 현대인에게 맞춘 한방 처방

 

전통과 과학의 경계에서 – 현대인에게 맞춘 한방 제안

 현대 사회에서 한약은 종종 ‘느리고 오래 걸리는 치료’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약방은 그런 고정관념을 깬다. 그는 오히려 현대인의 생활 방식에 맞춰, 한약을 조절하고 재구성한다. “요즘 사람들은 바빠요. 다려 마실 시간도 없고, 꾸준히 챙겨 먹기 힘들죠. 그래서 제 방식도 변해야죠.”

그는 전통 한약을 캡슐 형태로 제작하거나, 냉침(冷浸) 방식으로 차갑게 우려내 마실 수 있는 한방차를 개발했다. 특히 젊은 직장인을 위해 아침 출근 전 공복에 마시기 좋은 ‘속 편한 한방차’,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을 위한 ‘집중력 강화용 약차’ 등 현대인을 위한 맞춤형 처방을 선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젊은 한의사들과 협업하고, 약초 성분에 대한 최신 논문도 참고한다. 전통을 고수하되, 시대를 따라가는 유연함을 잃지 않은 셈이다.

또한 그는 약재의 원산지와 품질에도 각별히 신경 쓴다. “약은 재료가 전부입니다.” 그의 약방에서 쓰는 약재는 대부분 직접 거래하는 산지에서 공수한다. 강원도 인제의 황기, 전남 구례의 산수유, 지리산에서 재배한 감초까지. 모든 재료는 채취 시기와 건조 방식까지 확인한 후 사용한다. 때문에 약값은 다소 비싸지만, 단골 손님들은 “믿을 수 있는 재료니까 안심된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도 매일 아침 5시, 커피 대신 황기차를 한 잔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몸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깨우는 일은 의사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중요한 삶의 습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의사가 스스로를 잘 돌보지 않으면, 남에게도 힘이 되지 않죠.”

 

사라지는 것이 아닌, 살아남는 전통이 되기 위하여

 약령시는 이제 예전 같지 않다. 과거에는 전국의 약재상이 몰려들고, 거리마다 약초와 탕약 냄새가 진동했지만,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체험 부스와 카페가 더 많이 들어섰다. “예전에는 이 거리에서만 100명 넘는 한약사가 있었어요. 지금은 20명도 채 안 돼요.”라고 그는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는 그 변화를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이 살아남기 위해선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요즘은 젊은 약사나 예비 한의대생들이 찾아오면 약초 손질부터 탕전(煎藥)까지 하나하나 보여주고, 한약이 단지 ‘병을 고치는 수단’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도구’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방의 철학과 실용성을 남기기 위해 짧은 글들을 엮은 책도 준비 중이다.

그의 아들은 서울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종종 아버지의 약방을 도우며 고민을 나눈다. “이 길이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요.”라고 그는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한약을 넘어선 삶의 리듬을 전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이 약방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조용히, 묵묵히 전통을 지켜온 손길이 있고, 그 손길은 누군가에게는 건강을,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건넨다. 현대 사회가 놓치고 있는 느림과 경청, 정성과 직관이 바로 이 작은 공간에 녹아 있다. 전통이란 멀어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도 충분히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이 한약방은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