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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남해 멸치액젓 만드는 부부, 바다에서 온 선물의 숙성 기술

 남해 바다에는 계절마다 물빛이 달라진다. 봄에는 연하고, 여름에는 깊고, 가을에는 유난히 맑다. 그리고 이 바다에서 나는 멸치는, 단순한 생선이 아닌 삶의 일부다. 이 멸치가 간수와 함께 오랜 시간을 견디며 숙성되면, 우리는 그것을 ‘멸치액젓’이라고 부른다.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액젓 한 병 뒤에는 사실 상상도 못할 만큼의 정성과 시간이 담겨 있다.

남해군 서면의 한 어촌 마을, 그곳에는 30년 넘게 멸치액젓만을 만들어온 부부가 있다. 둘 다 바다에서 태어나고 자라 바다와 함께 늙어가고 있으며, 지금도 직접 멸치를 잡고, 손으로 소금에 절이고, 항아리 속에서 1년 넘게 기다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 부부에게 액젓은 ‘양념’이 아니라 ‘철학’이고, ‘생계’가 아니라 ‘사명’이다.

이 글은 단순히 액젓을 어떻게 만드는지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한 부부가 어떤 방식으로 전통을 지키고, 바다의 흐름을 이해하며, 그 속에서 사람의 손으로만 가능한 맛을 완성해내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 속에서, 느리고 정직한 발효의 가치를 지켜온 사람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남해 멸치액젓, 오랜시간 숙성해보다

 

멸치와 천일염, 단 두 가지로 만들어낸 진짜 맛

 멸치액젓의 핵심 재료는 단 두 가지다. 갓 잡은 멸치와 질 좋은 천일염. 이 부부는 매년 4월부터 6월 사이, 멸치가 가장 살이 오르고 기름이 많은 시기에만 액젓용 멸치를 채취한다. “멸치가 살이 올라야 액젓도 진해져요.” 남편은 멸치의 상태만 봐도 그 해 액젓의 맛을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멸치는 어판장에서 대량 구매하지 않는다. 직접 어선을 타고 멸치를 잡는다. 바다를 잘 아는 사람만이 멸치가 어디에 몰려 있는지를 알 수 있고, 그날의 바다 상태에 따라 어획량도 달라진다. 잡은 멸치는 곧바로 세척하고, 얼음 없이 서늘한 바람에 말리며 염장을 준비한다. 바로 이 과정이 멸치액젓의 향미를 좌우한다.

염장은 오직 신안산 천일염으로 한다. 소금은 미리 1년 이상 간수를 뺀 뒤 사용한다. 날것 그대로의 소금을 쓰면 멸치가 썩거나 신맛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멸치와 소금을 3:1 비율로 켜켜이 쌓아 장독대나 큰 항아리에 담고, 1년 이상 바깥에 그대로 둔다. 햇빛, 바람, 비, 계절의 변화 속에서 숙성이 시작된다.

중간에 한 번도 뒤적이지 않는다. “액젓은 손을 대면 안 됩니다. 그 안에서 자연이 알아서 해요.”라고 아내는 말한다. 발효의 원리를 따르기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항아리 안에서는 미생물과 효소, 단백질 분해가 일어나며 맑고 투명한 황금빛 액젓이 생성된다. 숙성이 다 끝나면 윗물만 조심스럽게 떠내고, 나머지는 다시 남겨 두었다가 다음 해 쓰인다.

 

액젓 한 병에 담긴 바다의 리듬과 사람의 손길

 이 집에서 만들어진 액젓은 전국으로 택배 배송된다. 주문은 주로 전화나 문자로 받는다. SNS나 쇼핑몰은 없다. “액젓은 설명보다 믿음으로 먹는 거예요.”라는 남편의 말처럼, 한번 맛본 사람은 해마다 다시 주문한다. 전라도, 경상도, 심지어 서울 강남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이 부부의 액젓을 쓴다.

이 집의 액젓은 특이하게도 짠맛보다 감칠맛이 강하다. 이유는 ‘간수를 뺀 소금’과 ‘1년 이상 숙성’이라는 기본 원칙을 절대 어기지 않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급하게 만든 액젓은 짜고 비린맛이 강한 반면, 이 집의 액젓은 맑고 향긋하며 콩나물국, 된장찌개, 무생채 어느 음식에 넣어도 맛이 살아난다.

아내는 요즘도 액젓을 한 숟갈 떠서 국물에 넣어볼 때마다 긴장된다고 말한다. “오늘은 간이 좀 약하네, 아니면 멸치향이 세네, 그런 걸 느끼는 게 바로 경험이죠.” 그녀는 모든 고객에게 요리법과 함께 액젓을 보낸다.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쓰는 사람까지도 배려하는 방식이다. “간장처럼 쓰지 말고, 끓는 국물에 살짝 넣으세요. 마지막 간에 쓰는 게 포인트예요.”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은 손님이 직접 찾아와 “이거 진짜 멸치만으로 만든 거 맞아요?”라고 물을 때다. “맞다”고 대답하면, 대부분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정직한 재료가 가진 설득력이고, 사람의 손이 만들어낸 신뢰의 맛이다.

 

느림을 지키는 삶 – 전통의 맛을 전하는 마지막 세대

 요즘은 액젓도 대형 식품 회사에서 대량 생산된다. 첨가물을 넣어 발효 기간을 줄이고, 향미 증진제를 더해 빠르게 판매할 수 있게 만든 제품들이 많다. 그런 시대에서 이 부부의 작업 방식은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액젓은 한정되어 있고, 품질을 위해 1년에 한두 번만 담근다. 하지만 이들은 그 느림이야말로 진짜 품질을 지키는 방법이라 믿는다.

젊은 사람들 중에 이 일을 배우려는 이는 아직 없다. 아들은 도시로 나가 직장 생활을 하고, 딸은 액젓 냄새가 싫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부부는 요즘,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정리해 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는 나중에 이 노트를 보고 다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들은 말한다. 언젠가 멸치와 소금, 그리고 시간을 믿는 사람이 또 나타나길 바란다고.

부부는 지금도 새벽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멸치 상태를 살피고, 항아리 뚜껑을 열어 숙성 상태를 확인한다. 여름이면 햇빛을 피하고, 겨울이면 바람을 맞히는 방식도 다르다. 바다의 온도, 습도, 해의 각도까지도 중요하다. “자연과 같이 살아야 그 맛을 알 수 있어요.” 이 말은 단순한 수산물 가공 노하우가 아닌, 자연에 순응해온 한 세대의 지혜다.

지금 이 부부가 지키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전통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들이는 일’, ‘정직하게 만드는 것’, ‘자연에 귀를 기울이는 삶’이라는 가치다. 액젓은 그런 삶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 총합이 오늘도 작은 병 하나에 담겨, 누군가의 밥상 위에서 조용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