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초입, 산자락이 천천히 흐르는 그 언덕길 한쪽에 작은 찻집이 있다. 간판은 ‘다관(茶館)’이라는 손글씨 세 글자뿐.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이곳을 찾는 이들은 꾸준하다. 이유는 단 하나, 이곳에선 '차를 마신다'기보다 '시간을 머무른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다실 한켠에 앉아 차를 따르는 소리를 들으면, 일상에 밀려 잊고 지낸 여백의 미가 되살아난다.
이 찻집을 운영하는 주인은 올해 예순을 넘겼다. 30대 중반에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문경으로 내려와 다도(茶道)를 배우며 살아온 지 25년이 넘었다. 지금도 매일 새벽이면 가게 마당의 찻잎을 만지고, 물의 온도를 체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차를 우리기 전에는 반드시 마음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는 늘 낮고 느리다.
이 글은 단순히 차를 파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도라는 전통 문화가 어떤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현대인의 삶 속에 어떻게 필요한 쉼표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 사람의 꾸준한 철학과 행동이 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찻잎, 물, 도구 – 차를 내리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찻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도자기 다기(茶器)들이다. 그는 직접 문경 지역의 도예가들과 협업하여 만든 찻잔, 다관, 숙우(물 식히는 그릇)를 사용한다. 손님에게 낼 차도 모두 자신이 보관하는 전통방식의 유기농 발효차, 혹은 직접 말린 작설차를 사용한다. "찻잎은 그냥 건조된 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기운을 품은 식재료입니다."
그는 차를 내릴 때 도구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는다. 물은 지하 80미터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로, 하루 전에 채워 상온에 두었다가 사용한다. 물의 온도는 차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녹차는 70도, 우롱차는 85도, 보이차는 끓는 물을 바로 사용한다. 그는 말한다. "차는 성질이 다 다릅니다. 사람과 똑같아요. 다 똑같이 대하면 그 본래의 맛을 내지 못하죠."
차를 내리는 행위는 단순히 손의 기술이 아니다. 찻물을 붓는 속도, 찻잔을 놓는 소리, 심지어 손님의 시선을 피하며 차를 따르는 자세까지도 하나의 ‘예(禮)’로 여긴다. 이 모든 과정은 서두르지 않되, 과하지도 않게 흘러야 한다. “차는 조용히, 묵묵히, 그러나 정확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까지 전해져요.”
그는 손님이 오더라도 차를 바로 내지 않는다. 반드시 찻집의 기운에 먼저 적응할 시간을 준다. 그 시간이 바로 차를 마시기 위한 준비이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첫 의식이라는 것이다.
전통의 차 문화가 현대인에게 주는 쉼과 방향
그는 차를 ‘휴식의 기술’이라고 표현한다.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차는 잠시 멈추는 법을 알려주는 도구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찻집에는 카페처럼 시끄러운 음악도 없고, 와이파이 안내도 없다. 오직 바람 소리, 물 끓는 소리, 그리고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그의 단골 중에는 회사원, 교사, 작가, 요가 강사 등 다양한 직업군이 있다. 대부분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조용한 휴식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다. "한 잔의 차가 이렇게 깊은 위로가 될 줄 몰랐어요."라고 말하는 손님들의 반응이 그가 이 일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그는 손님이 다 마시고 나간 뒤 그 자리에 앉아 찻잔의 흔적을 바라본다. “그 사람의 속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그는 또한 다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1년에 두 번 무료 강습을 연다. 다도는 기술보다 태도의 훈련이라고 믿기 때문에, 실습보다는 철학과 마음가짐을 먼저 가르친다. “차를 마시는 일은 결국, 나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차를 소개하며, 현대인의 마음에도 ‘고요한 틈’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차는 간단한 듯 깊고, 따뜻한 듯 엄격하다. 그것은 단지 음료가 아니라, 삶의 흐름을 잠시 바꿔주는 행위다. 그래서 그의 찻집을 찾는 사람들은 차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돌아간다. 조용한 시간, 느린 호흡, 잊고 있던 감각. 그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그의 ‘다관’이다.
다관이라는 문화, 그리고 사라지지 않아야 할 정신
요즘은 ‘차’보다는 ‘커피’가 일상의 중심이다. 젊은 층 사이에선 텀블러에 담긴 라떼 한 잔이 휴식의 상징이 되었고, 수많은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속도와 효율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다관이라는 전통 공간을 지키며 말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걸 마시지만, 제대로 음미하지는 않아요.”
그는 하루에 차를 10잔 이상 마시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차는 ‘아침 첫 잔’이다. 그 잔은 누구와도 마시지 않고, 혼자 고요히 내려 마신다. 그 시간을 통해 하루를 조율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차는 나를 잃지 않게 해주는 존재예요. 잊어버린 중심을 다시 잡아주는 도구죠.”
문경이라는 지역적 특성도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곳은 조용하고, 계절의 변화가 또렷하며, 자연과 맞닿아 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찻집을 연 것이 ‘운명 같은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도시였다면 지금처럼 오래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공간이 사람을 바꾸고, 차가 마음을 바꿉니다. 저는 그저 중간 역할을 할 뿐이죠.”
지금도 그는 하루에 수십 번 다관을 정돈하고, 찻잎을 살피고, 손님의 빈 찻잔을 닦는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기록되지 않아도. 그것이 그가 지켜온 방식이고, 다관이 가진 진짜 가치다. 전통은 누군가에겐 불편한 형식일 수 있지만, 그 속엔 우리가 놓친 ‘느린 감각’과 ‘진짜 쉼’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쉼은 지금도 문경의 조용한 찻집에서 조용히 우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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