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 한옥마을을 걷다 보면, 고즈넉한 기와지붕 사이로 전통 옷감을 다듬는 이의 손길이 보인다. 찬란한 햇빛 아래 자연 염색된 한복 치마가 너풀거리는 모습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을 준다. 우리는 흔히 한복을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 때 입는 옷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한복이 단지 ‘입는 것’을 넘어서 ‘사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글은 북촌에서 30년 넘게 한복을 지어온 한 장인의 이야기다. 그는 전통을 고집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왔다. 한복을 지을 때 그는 단지 디자인만 고려하지 않는다. 옷을 입는 사람의 체형, 직업, 계절, 그리고 취향까지도 함께 담는다. 그는 말한다. “한복은 사람을 감싸주는 옷이에요. 멋이 아니라 마음을 담는 작업이죠.” 이 글은 바로 그 마음의 작업을 따라가본 기록이다.
한복의 본질은 선(線)이다 – 곡선과 여백의 미학
한복을 처음 접하면 화려한 색감에 시선이 머물지만, 장인은 말한다. “한복은 색보다 선이 중요해요.” 곧은 선, 휘는 선, 겹쳐지는 선이 모여 곡선의 미학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통 한복은 바느질보다는 접음과 여밈의 구조로 완성된다. 그래서 재단이 아주 중요하다. 1cm만 틀어져도 옷의 흐름이 깨진다. 장인은 ‘한복은 몸을 꾸미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감싸는 옷’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사용하는 옷감은 대부분 손으로 짠 전통 모시, 명주, 실크다. 비싸고 관리가 어렵지만, 그만큼 자연스럽게 몸에 흐른다. 그는 “사람마다 체온이 다르니까, 옷감이 살아 움직이는 걸 느껴야 해요”라고 말한다. 특히 여름에는 얇은 모시 한 겹으로 만든 저고리나 치마를 주문하는 이들이 많다. 땀은 배출되면서도 해는 차단되는 이중 구조는 수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자연 친화형 패션’이다.
이 장인은 치수를 잴 때 고객의 팔꿈치 움직임, 걷는 습관, 앉는 자세까지도 유심히 본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옷은 그걸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서 그의 한복은 사진보다 ‘입고 걸었을 때’ 더 아름답다. 곡선이 살아 있고, 천이 흐르는 방향이 자연스럽다. 단순히 옷이 아닌, ‘움직이는 조형물’처럼 느껴진다.
전통을 입는 젊은이들 – 시대를 꿰매는 실
최근 한복에 대한 관심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북촌 일대에서는 커플들이 한복을 입고 데이트를 하거나, 졸업사진, 웨딩 촬영용 한복을 빌려 입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장인은 말한다. “한복을 한 번 체험해본다고 전통을 아는 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일상 속에서 한복이 살아 숨 쉬는 거예요.”
그는 몇 년 전부터 ‘생활한복’을 별도로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의 편한 의복에서 영감을 받아, 앉고 걷기 쉬운 구조로 만들었다. 원단은 전통 그대로이되, 디자인은 심플하게 바꿨다. 그 결과 젊은 고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요즘은 SNS를 통해 주문이 들어오고, 택배로도 맞춤 한복을 보낸다. 한복이 ‘전통’에서 ‘지금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변신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한복은 프랑스, 일본, 캐나다 등지로도 수출된다. 특히 외국인 고객 중에는 ‘동양적인 절제미’에 반한 이들이 많다. 그는 해외 박람회에 참여하지 않지만, 입소문만으로 해외에서 연락이 온다. “전통을 지키려면 시대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은 박물관에 두는 게 아니라 입고, 쓰고, 살아야 해요.” 이 말은 그가 30년 넘게 지켜온 철학이자, 한복을 살아 있는 문화로 만든 원동력이다.
옷을 짓는다는 말, 그 안에 담긴 장인의 정신
장인은 한복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짓는다’고 표현한다. 짓는다는 말 안에는 옷뿐 아니라 정성과 시간, 마음까지 함께 담긴다. 실제로 그가 한 벌의 한복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2주, 길게는 한 달 이상이다. 천을 고르고, 재단하고, 손바느질로 마감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는 말없이 집중한다. “옷을 짓는 시간은, 입을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이에요.”
한복 장인의 작업실 벽에는 수많은 실과 바늘, 색색의 옷감이 걸려 있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건 ‘손의 흔적’이다. 오래된 재봉틀, 바느질이 굳은 손등, 그리고 고객들의 감사편지들이 그의 기술을 말없이 증명한다. 그는 SNS도, 온라인 쇼핑몰도 하지 않는다. 오직 소개로만 손님을 받고, 오더메이드 방식으로만 옷을 짓는다. “수량은 적어도, 마음이 남아야 옷이죠.”
그의 꿈은 단순하다. 북촌이라는 공간에서 한복이 여전히 ‘입히는 옷’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요즘은 손녀가 주말마다 와서 바느질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이 옷을 입고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도 이 옷을 선택해준다면, 전통은 이어지는 거죠.” 이 말에는 화려함도, 전략도 없다. 다만, 전통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장인의 고요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는 오늘도 조용히 바늘을 든다. 북촌의 옛 한옥 안, 바람이 잘 드는 창가에서. 그리고 우리는 그 손끝에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전통과 현재를 잇는 진짜 한복의 의미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한복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숨 쉬는 전통이다. 북촌의 이 한복 장인은 오늘도 고요한 작업실에서 천을 자르고, 바느질을 하며 시간의 흐름을 짓는다. 그는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감싸는 방식으로 한복을 이해한다. 손끝에서 이어지는 선 하나, 바느질 하나에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철학이 녹아 있다.
그가 지어낸 한복은 단순히 보기 좋은 옷이 아니다. 입는 사람의 성격, 직업, 계절, 생활방식까지도 담아낸, 말 그대로 ‘맞춤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느림, 정성, 여백의 가치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전통은 특별한 날에만 꺼내 입는 장식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삶 안에서 이어져야 한다.
그의 손이 계속 바느질을 멈추지 않는 한, 전통은 단절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옷을 통해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장인을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 멸치액젓 만드는 부부, 바다에서 온 선물의 숙성 기술 (0) | 2025.06.29 |
---|---|
광주 5일장 떡집 주인, 정성으로 쪄내는 시간의 맛 (0) | 2025.06.28 |
부여 전통 장 담그는 집, 자연 발효 20년 외길 인생 (0) | 2025.06.28 |
통영 나전칠기 장인, 세계로 수출되는 전통 기술 (0) | 2025.06.27 |
안동 헛제사밥 고수, 가족의 맛을 지키는 사람들 (0) | 2025.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