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끝자락, 한적한 항구 마을 위쪽 언덕에 폐교 한 채가 서 있었다.
기자는 처음 이곳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다. "폐교가 바다를 관측하는 공간으로 쓰인다고요?" 그 의문이 기자를 그곳까지 이끌었다.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옛 초등학교 분교는 2009년 폐교된 후 장기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해양과학 연구소, 기상청 협력팀, 지역 청년 과학인들이 손잡고 이곳을 ‘소규모 해양 데이터 관측소 겸 교육연구 공간’으로 리모델링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파도학교(Sea Sense School)’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며 해양 센서 데이터 수집, 기초 기후 연구, 그리고 일반인을 위한 체험형 해양 교육 프로그램까지 함께 진행되고 있다.
기자는 이곳에서 바다를 ‘눈으로 보기보다 숫자와 센서로 읽는 방법’을 배워보게 되었다.
폐교라는 하드웨어에 데이터를 더하다
건물 외형은 여전히 시골 학교 그대로였다.
나무 프레임의 창틀, 운동장에 남아 있는 철봉, 그리고 방치된 듯한 감나무 한 그루. 그러나 내부에 들어서자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1학년 교실은 실시간 해수온도 및 염분 데이터 모니터링실로 바뀌었고, 2학년 교실은 드론 조종과 해안지형 분석 워크숍이 이뤄지는 실습실이 되었다.
과학실이 있던 자리는 지금은 기상 관측소와 연동된 데이터 서버실로 활용되고 있다.
기자는 복도 벽면을 따라 정리된 ‘지난 10년간의 파도 기록’ 아카이브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폐교가 가장 과학적인 기록 보관소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묘한 감동과 위화감을 동시에 줬다.
해양 기후 데이터를 시각화한 대형 디스플레이 앞에서는
지역 학생들이 함께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연구시설이 아니라 지역과학의 거점이자 실험실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기자는 이 작은 폐교가 연구소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파도를 듣는 교실, 숫자 뒤의 이야기
기자가 참여한 프로그램은 '바다 데이터를 읽는 법'이라는 2시간짜리 시민 교육 과정이었다.
노트북 한 대, 센서 키트, 위성 기반 해류 시뮬레이터가 제공되었고, 현장 강사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해양기후 전문가였다.
“지금 보시는 숫자들은 모두 학교 바로 앞 해안선에서 10분 단위로 수집되는 실제 값이에요.”
강사는 그렇게 설명하며 기자의 화면을 가리켰다.
파도 높이 0.6m, 해수온 17.3도, 염분도 35.1 PSU
숫자만 놓고 보면 무미건조했지만, 그 데이터가 ‘지금 여기의 바다’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자 기자는 묘한 생동감을 느끼게 되었다.
강사는 이어 말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아요. 그 대신 해석은 사람의 몫이죠.”
기자는 그 말에서 이 공간의 철학을 읽을 수 있었다.
자연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담담히 기록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한 배움일지도 모른다.
기억보다 정확한 기록이 남는 공간
관측소에는 지역 어르신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기후 변화 이야기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30년 전 겨울엔 앞바다에 얼음이 언 적도 있었고, 바다 색이 변한 시기와 어장 변화가 맞물려 있었다는 구술 자료도 있었다.
기자는 그 기록들을 읽으며 숫자와 감각이 함께 보관되는 드문 공간이라는 점에 깊이 감탄했다.
이 작은 폐교는 지금도 매일 데이터를 수집한다.
주말마다 열리는 오픈데이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도 많고 간단한 센서 조립 체험과 드론을 띄워 해안선 변화를 관찰하는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과학이 단절된 공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폐교 공간에서도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 기자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그날 저녁, 기자는 교실 끝 창가에 앉아 파도 소리와 데이터 그래프를 함께 바라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기록하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순간 실감할 수 있었다.
파도처럼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남는 공간
폐교는 더 이상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공간이지만 이곳은 여전히 조용한 방식으로 우리 삶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습의 방식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 교실 안에선 ‘자연과 미래를 배우는 수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방명록에 한 줄을 남겼다. “이곳의 숫자들이 우리 삶을 더 오래 기억해줄 것 같습니다.”
그 문장을 쓰는 손끝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폐교는 더 이상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을 설계하는 현재의 실험실이었다.
기자는 돌아가는 길, 헤드폰을 빼고 파도 소리를 오래 들었다.
그 소리는 교실 벽에 고스란히 기록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는, 그리고 폐교는 오늘도 조용히, 누군가에게 데이터를 통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숫자는 사라지지만, 공간은 기억을 남긴다
며칠이 지나 기자는 도시의 책상 위에서 그날 받은 관측소 리플렛을 꺼내 들었다.
센서 수치와 시간 단위로 정리된 작은 표 안에는 그날의 바람과 파도, 염분과 온도가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숫자들을 바라볼수록 기자는 교실 안의 낡은 창틀 그 틈새로 스며들던 바닷내음, 그리고 무언가를 조용히 관찰하던 아이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기록이란 단지 데이터를 남기는 행위가 아니라 공간에 머문 감정을 되살리는 언어이기도 했다.
폐교는 그날 이후에도 매일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시간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이 작은 교실 안에 천천히 쌓여가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떠나지만, 공간은 기억을 저장하고 기록은 그 기억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된다.
기자는 그날의 기록이 단지 바다를 위한 것이 아니라사람을 위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조용한 교실에서 배우는 가장 중요한 수업
폐교에서의 마지막 순간, 기자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며 바다와 마주 섰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일이 이토록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행위일 줄은 몰랐다.
그 공간은 소란스러운 도시의 정보보다 훨씬 명확하고 정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자연은 늘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듣기만 하면 된다.” 기자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조용히 파도 소리를 떠올렸다.
그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기자 안에서 더 또렷해졌다.
폐교는 오늘도 그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의 첫 기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기자는 다시 돌아가 그 교실에서 두 번째 수업을 듣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폐교 활용공간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폐교를 리모델링한 신비로운 계절 별장 체험기 (0) | 2025.08.01 |
---|---|
폐교를 개조한 작은 카페에서의 하루 (0) | 2025.07.31 |
폐교를 활용한 독립출판소 체험기 (0) | 2025.07.30 |
폐교를 활용한 로컬 공예 체험공간 후기 (0) | 2025.07.29 |
폐교 운동장을 활용한 작은 야외영화제 후기 (0) | 2025.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