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지도를 보다가 눈에 띈 작고 낯선 지명을 따라가 봤다.
강원도 평창의 한 마을, 더 이상 수업이 열리지 않는 폐교에 작은 카페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커피향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는 말에 기자는 어떤 감정인지 모를 호기심을 품고 그곳을 찾았다.
도착한 카페의 외관은 분명히 옛 초등학교였다.
낡은 담장, 아이들이 그린 벽화, 교실 창문에 달린 하얀 커튼. 그러나 그 문을 여는 순간,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칠판은 메뉴판으로 바뀌었고, 교탁 자리엔 커피 머신이 놓여 있었다.
책상 대신 놓인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기자는 이곳에서 커피보다 더 많은 것을 마셨다.
기억, 여유, 침묵, 그리고 오래된 감정의 잔향까지. 폐교라는 공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느리게 흐르는 감정의 흐름이 되었다.
폐교 교실이 카페가 되기까지, 한 잔의 커피처럼 천천히
‘느린학교 커피’라는 이름의 이 카페는 마을 청년 둘이 직접 리모델링하며 3년간 준비한 공간이다.
교실 2칸을 합쳐 카페 공간을 만들고 교무실은 로스터리와 창고로, 복도는 갤러리 겸 북코너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마을에서도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이 시골 학교에 누가 커피 마시러 오겠어?”라는 말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주말이면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들로 조용한 북적임이 생긴다.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은 커피 때문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를 음미하러 온다.
어느 곳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의 깊이’가 이곳에는 있었다.
기자는 벽면에 붙은 사진들을 바라보다가 멈춰섰다.
아이들이 줄을 서서 운동장으로 나가던 장면, 졸업식 풍선이 날아가던 하늘. 그리고 지금, 커피를 내리고 있는 주인장의 모습.
이 카페는 과거와 현재가 겹쳐진, 조금 특별한 교실이었다.
커피는 부드럽고,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기자는 바 테이블에 앉아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주인장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을 붓고 손목의 각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며 천천히 추출을 이어갔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한 편의 수업 같았다.
바로 앞에서 누군가의 정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공간의 철학이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며 기자는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는 오래된 잡지를 넘기고 있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종이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대화조차 필요 없었다.
모두가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정적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안도감을 줬다.
주인장은 “이곳은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곳이에요.”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 말을 들으며 도시에서는 잊고 있던 감각 하나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벽면의 분필 글씨, 그리고 누군가의 추억
한쪽 벽에는 아직도 분필 글씨가 남아 있었다.
‘2020년 3월 3일, 커피 수업 시작.’ 그 아래에는 누군가 남긴 문장도 보였다.
“이곳에서는 마음이 느리게 내려앉는다.”
기자는 그 글이 카페의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벽의 한 구석엔 작은 책장이 있었고 그 안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남긴 소책자, 엽서, 사진들이 가득했다.
기자는 누군가가 쓴 시 한 구절을 읽었다.
“세상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내 마음의 소리는 또렷해진다.”
이 카페는 단지 커피를 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느린 교실’이었다.
오래된 건물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 그 안에서 나누는 조용한 공감, 그것이 이곳의 진짜 메뉴였다.
다시 벨이 울릴 때까지, 머물고 싶은 교실
커피를 다 마신 기자는 창가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어디에도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시간이 천천히 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교실에는 또 다른 ‘배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자는 이 카페를 떠나며 한 가지를 확신했다.
폐교는 사라진 공간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기억을 이어가는 살아 있는 장소라는 것. 사람은 추억이 깃든 공간에 가장 깊은 감정을 남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커피향처럼 조용히 퍼져나간다.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을 때 기자는 또 어떤 시간의 향을 마시게 될까.
그 생각만으로도, 이 느린 교실의 하루는 기자의 마음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수업처럼 남아 있었다.
익숙한 풍경, 새로운 의미
기자가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운동장 끝 작은 텃밭이었다.
그곳에는 카페 주인장이 직접 가꾸는 허브와 꽃들이 자라고 있었고 작은 푯말엔 ‘내일 사용할 재료들’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커피 한 잔의 배경에 이토록 섬세한 손길이 숨어 있다는 사실에 기자는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텃밭 너머로 보이는 산등성이, 교실 뒤편으로 흐르던 바람, 이 모든 익숙한 시골 풍경이 이제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폐교는 사라진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때 폐교는 다시 살아나는 ‘감정의 장소’가 된다.
기자는 이곳에서 단지 커피만 마신 것이 아니라 공간이 주는 정서를 마셨고, 그 정서는 도시의 어떤 카페에서도 느낄 수 없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오래된 교실, 마음을 내려놓는 자리
기자가 떠나려던 순간, 교실 문 앞에 앉아 책을 읽던 한 손님이 기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 공간, 참 조용한데 따뜻하죠. 그냥 자주 오고 싶어요.” 그 짧은 한 마디에 이 카페의 모든 가치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조용함과 따뜻함, 바로 그것이 이 폐교 카페가 만들어낸 최고의 메뉴였다.
기자는 다시 도시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늘 마신 커피의 맛을 떠올렸다.
쓴맛도, 단맛도 있었지만 가장 강하게 남은 건 ‘느림’이라는 향이었다.
그 향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기자가 바쁜 일상에 지칠 때마다 다시 이 느린 교실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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