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한때 군사경계선이었던 이 고요한 마을에 지층이 겹겹이 드러난 절벽 아래서 돌을 다듬는 한 남자가 있다.
지질연대 수천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 화석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장인, 홍태식 씨. 그는 스스로를 '돌을 여는 사람'이라 소개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체를 돌 속에서 상상하고, 천천히 긁고 갈아내며, 마침내 수천만 년 전 생명의 흔적을 세상 위로 꺼낸다. "화석은 옛날의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가 듣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요." 그가 돌을 쪼고 닦는 일은 단순한 채굴이 아니라 시간 속에 묻힌 생명을 오늘로 불러오는 조용한 구술 작업이다.
양구 화석, 돌 속에서 생명을 꺼내는 손끝의 감각
화석 발굴은 단순히 돌을 깨는 일이 아니다. 홍 장인은 말한다. “무작정 두들기면, 거기 남아 있던 생명의 기억까지 부숴버리죠.” 그는 먼저 돌의 결을 읽는다. 바위의 갈라짐, 점토층의 성질, 습도와 온도까지도 계산하며, 얇은 조각칼과 송곳으로 표면을 긁는다. 한 줄 긁을 때마다 소리를 듣는다. “딱딱한 돌과 생명의 자국은 소리부터 달라요. 돌은 멍청한데, 화석은 울림이 있어요.” 화석 하나를 발굴하는 데 최소 일주일, 길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는 속도를 재지 않는다. “속도는 기계의 것이고, 생명은 느림에서 나오죠.” 그렇게 건져 올린 작은 물고기 이빨, 양서류 뼈, 심지어 미세한 잎의 흔적까지 그는 전부 기억하고 기록한다. 이 모든 흔적은 하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깨뜨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손기술
화석은 단순히 파내기만 해선 보존될 수 없다. 깨지기 쉬운 석회암 속에 있는 화석은 공기만 닿아도 부서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홍 장인은 발굴 직후, 자신만의 비율로 섞은 천연 수지와 아교를 발라 화석의 결을 보강한다. 이 과정은 마치 수술 같기도 하다. 작은 솔로 수지를 얹고, 뼈의 방향을 따라 결을 이어붙이며 본래의 생김새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복원해나간다. “화석은 우리가 보게 만들어야 살아 있어요. 그대로 두면 그냥 돌이에요.” 그는 틀어진 화석의 위치를 교정하고, 잘못 박힌 조각은 다시 떼어내 복구한다. 이 모든 과정은 데이터가 아니라 감각이다. 그는 실리콘 몰드나 스캐닝 기술보다 자신의 손을 더 믿는다. 그 손끝의 정성과 시간은 기계로는 구현할 수 없는 따뜻한 기록이 된다.
생명과 시간, 그 사이에 남는 질문들
그가 복원한 화석 중 일부는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작품이나 수집품이라는 이름 대신, ‘기억 조각’이라고 부른다. "이게 얼마나 오래됐고, 어떤 동물이고,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그 생명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는 아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매달 자연사 강연을 연다. 단순한 지질학 설명이 아니라, 화석을 통해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찾는 과정의 의미를 전한다. “지금 이 손에 들린 돌 속에서, 잎 하나가, 비늘 하나가 남겨졌다는 건 그 생명도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랐다는 뜻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돌을 팔지 않는다. 그는 화석을 수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을 꺼내는 사람이다.
장인은 기록자가 아니다, 기억의 목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화석을 박제된 과거로 본다. 하지만 홍 장인에게 화석은 지금도 말을 건네는 존재다. 소리도 없고 색도 없지만, 그 모양 하나만으로 생명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존재. 그는 단지 돌을 만지는 사람이 아니라, 돌에 남은 생명의 언어를 해독하는 번역자다. “나는 증명을 하지 않아요. 다만, 그 자리에 있었던 걸 보여주는 거죠.” 그는 지금도 매일 새벽이면 작업실에 나와 작은 조각들을 닦고, 정리하고, 다시 붙여본다. 돌 속에 감춰진 미세한 결이, 새로운 구조로 이어질 가능성을 생각하며 말이다. 그는 한 번도 똑같은 화석을 본 적이 없다. “돌은 반복되지만, 생명은 반복되지 않아요.” 그 말처럼 그는 각 화석에 새로운 이름과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잊힌 생명에게 주는 마지막 예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남는 건 돌이 아니라, 시간의 이야기다
돌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속에 남겨진 화석은 묵묵하게 존재의 흔적을 말한다. 홍태식 장인이 하는 일은 단지 돌을 가공하는 기술이 아니라 잊힌 시간을 꺼내고, 생명의 존재를 다시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가 꺼낸 조각 하나는 누군가의 지난 생이고, 또 누군가에겐 배움의 시작이며, 지금 우리에겐 다시 한번 자연을 바라보게 하는 기회다. 그가 매일 만지는 화석은 조용히 말하고 있다. 자연은 반복되지만, 생명은 단 한 번뿐이라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들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장인은 과거를 복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이 다시 숨 쉴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 시간은 비로소 오늘의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잊고 있는 시간에 손을 얹는 일
홍태식 장인이 매일 돌 위에 손을 얹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그는 과거를 복원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라진 존재의 말 없는 이야기를 지금에 연결하려는 사람이다. 돌은 오래되었고, 조용하며, 단단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살아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흔적을 꺼내려는 한 사람의 손길이 있다면 그 시간은 다시 현재로 이어진다. 화석은 과거의 기록이지만,
그 기록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과 태도는 지금의 것이다. 장인은 그 간극을 잇는다. 조용히, 정직하게, 반복해서. 그래서 그의 손은 기술보다 더 깊고, 그가 복원한 화석은 자료보다 더 오래 기억된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도 같다. 시간은 멀지만, 마음은 가까울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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