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 금속과 유리의 온기가 공존하는 오래된 작업장 안에서 무심하게 지나치는 빛 한 줄기가 유리 조각 위로 흘러내린다.
그 빛은 단단한 듯 부드럽고, 날카로운 듯 투명하며 불을 지나온 시간만큼 유리의 단단해진 감정을 담고 있다.
이 공간에서 30년 넘게 유리공예를 이어온 이경무 장인은 말한다. “유리는 본래 거울 같지만, 불을 지나오면 눈이 되죠.
사람이 쓰는 유리는 시간을 보는 창이에요.” 그의 작업대 위에는 크고 작은 유리 조각들이 쌓여 있다.
깨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조각 하나하나가 장인의 손을 거치면 빛을 품고, 공간을 담는 유리 그릇이 된다.
그가 만드는 유리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을 담는 도구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를 투명하게 이어주는 매개체다.
유리공예 불을 다룬다는 건, 재료보다 마음을 먼저 읽는 일
유리는 단단하지만, 만들어지는 과정은 유약하다. 이경무 장인이 유리를 다루는 첫 번째 단계는 ‘온도를 읽는 일’이다.
그는 유리를 직접 녹이지 않고, 유리봉이나 유리파이프를 1,200도 이상의 불 속에 천천히 녹이며 형태를 만든다.
이 작업은 온도와 시간의 싸움이다.
너무 빨리 꺼내면 깨지고, 너무 늦게 꺼내면 무게중심이 틀어져 버린다. 그래서 그는 눈보다 손의 온도로 유리를 확인한다.
“불은 늘 일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유리는 온도보다 마음으로 읽어요. 손끝으로 느껴지는 무게와 저항이 그날의 재료 상태를 말해줘요.” 유리를 녹이는 과정에서 그는 '붓다(Buddha) 불'이라고 불리는 연한 청백색의 불꽃을 사용한다.
이 불은 온도 변화가 민감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작업자는 미세한 흔들림에도 반응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작업 전에 손을 찬물에 담그고 손바닥을 가볍게 털어 내 감각을 리셋한다.
“내 손이 가볍고 중립일수록 유리의 흐름을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그는 유리가 말 없이 말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방울처럼 늘어지는 순간 유리가 흐르는 속도와 색이 미묘하게 달라질 때 그는 불에서 꺼내 다음 동작으로 연결한다.
그는 말한다. “유리를 깎는 게 아니라, 유리가 흘러가고 싶은 방향을 살려주는 거예요.”
투명함을 조각하는 손, 흐름을 붙잡는 기술
유리는 형태를 얻는 순간부터 식기 시작한다. 그래서 불에서 꺼낸 직후의 1~3초가 가장 중요하다. 이경무 장인은 불에서 꺼낸 유리봉을 돌려가며 미리 준비한 금속 틀 혹은 나무 주걱으로 모양을 만든다. 이때 사용하는 도구는 단지 틀이 아니라 유리의 흐름을 막지 않으면서도 모양을 잡아주는 감각적 도구다. “유리를 멈추려 하면 깨져요. 흐름을 같이 타줘야 해요.”
그래서 그는 도구를 밀기보다 따라가고 유리를 꺾기보다 감싸듯 돌린다. 하나의 유리컵을 만들기 위해선 4~6단계의 성형 과정이 필요하다. 처음은 바닥, 두 번째는 옆면, 세 번째는 입구, 그다음은 입술 닿는 끝단을 매끄럽게 정리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중간에 망설이거나 멈추면 균열이 생기거나 유리의 무게가 쏠려 모양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손의 순서를 익히기 위해 매일 '동작 연습'을 한다. 마치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처럼, 유리도 손의 흐름을 기억한다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손은 유리를 만지지 않지만, 유리는 손을 기억해요.” 그래서 그의 작업대엔 늘 같은 위치에 같은 도구가 놓여 있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구조를 만들어두는 것이다. 이 질서 속에서 유리는 자신의 무게와 온도에 따라
자연스러운 선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의 유리는 어느 하나 억지스러운 선이 없다.
곡선은 곡선대로, 직선은 직선대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색을 입히는 건 기억을 입히는 일
이경무 장인의 유리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건 ‘유리색’이다. 그의 유리는 맑은 투명함 속에 한 줄기 푸른빛이 감돈다.
어떤 건 연한 담황색이고, 어떤 건 분홍빛이 돈다. 이 색은 염료나 물감으로 낸 것이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건 천연 광물, 구리분말, 철산화물, 석영, 백토 등이다. 이 광물들을 유리에 녹여내면 빛에 따라 달라지는 은은한 색감이 입혀진다. 그는 색을 넣기 전에 반드시 ‘기억’을 정한다. “이 색은 봄 아침 이슬빛이고 이건 어머니가 쓰던 주전자 색이에요.”
그에게 유리의 색은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의 기록이다. 그래서 그는 같은 색을 다시 만들지 않는다. 색의 농도와 온도, 바람의 세기 그날의 습도까지 다르기 때문에 그 색은 단 한 번밖에 태어나지 않는다. 그의 유리는 그렇게 시간의 감정을 담은 색을 갖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유리를 보고 ‘젖은 빛’이라고 말한다. 보는 이에 따라 그 색은 투명하거나, 흐릿하거나,
혹은 무채색으로 느껴진다. 그건 유리 자체의 특징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기억이 빛을 통해 사람의 감정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색은 빛을 만나야 본색이 나요. 그 사람 눈에 들어가서 완성되는 거예요.” 그의 유리는 그래서 늘 미완이다. 그걸 바라보는 이가 완성시킨다.
유리는 남지만, 불은 사라진다
이경무 장인이 유리를 만드는 작업은 결국 사라지는 시간과 남는 형태의 공존이다. 유리는 남지만, 유리를 만든 불과 손의 열기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아침 불을 피우고, 밤이 되면 유리를 꺼내 조심스럽게 닦는다.
그는 말한다. “유리는 완성되면 조용해요. 빛이 들어오기 전까진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래서 그는 유리 하나하나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 누군가 그 유리를 마주한 순간 자신만의 감정을 담을 수 있도록 이름 없는 유리로 남겨둔다. 그의 유리는 미술관보다 일상의 주방, 창가, 책상 위에서 더 잘 어울린다. 생활 속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자연스럽게 빛나도록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쓰는 유리’를 만든다. 사용할수록 더 맑아지고, 지문이 닿아도 예쁜 살아 있는 유리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리를 만드는 건 불의 시간을 옮기는 일이에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내가 선을 그은 거죠.” 그의 유리는 그래서 조용하지만 깊고 단단하지만 무르며 사라지지 않지만 변하는 존재다. 그 유리 위에 오늘의 빛이 지나가고 누군가의 눈에 감정이 번져가는 그 순간. 그제서야 하나의 유리는 기억이 되는 그릇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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