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 매년 봄이 오면 산골 마을의 바람이 달콤해진다. 진달래, 민들레, 제비꽃, 머위꽃까지…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 이 마을의 작은 부엌에선 하루 종일 기름 냄새와 꽃 향이 어우러진다. 그 중심에는 올해 예순아홉, 화전을 만드는 박희순 장인이 있다. 그녀는 말한다. “꽃잎은 그냥 예쁜 게 아니에요. 그 계절에 피는 꽃은 그때 먹어야 하는 거예요.” 그녀는 진달래와 쑥으로 반죽을 만들고, 머위와 꽃잎으로 얇은 전을 부쳐 계절의 시간을 입 안에 담는 화전을 빚는다. 그녀의 화전은 기계가 만들 수 없다. 그 이유는 재료가 늘 변하기 때문이다. 쑥의 물기, 진달래 꽃잎의 크기, 바람이 지나간 꽃받침의 질감까지 매번 다르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새벽 꽃을 따고, 쑥을 데치고, 손으로 찧는다. 반죽은 너무 치대면 질어지고, 덜 하면 흩어진다. “계절은 조절할 수 없어요. 꽃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화전은 늘 손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녀의 손끝은 계절의 촉감을 기억하는 손이다.
문경 전통 화전-불보다 온도가 중요한 화전의 시간
박 장인은 화전을 지지기 전, 팬보다 기름을 먼저 본다. 기름의 온도는 그녀의 손등과 귀로 측정된다. 손등에 느껴지는 열기, 팬을 들었을 때 울리는 소리, 기름의 향이 퍼지는 속도. 모두가 불 조절의 기준이다. “화전은 센 불에 지지면 꽃이 죽어요. 불이 아니라 온도로 굽는 거예요. 바삭한 전이 아니라, 말랑하고 향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그녀는 반죽 위에 꽃잎을 얹을 때도 방향을 고른다. 꽃술이 아래로 가면 향이 눌리고, 위로 가면 부드럽게 퍼진다. 한 송이의 꽃이 한 장의 전 위에서 살아 움직이듯 배치된다. 그리고 지글지글한 소리 사이로, 고소한 냄새와 꽃향이 어우러진다. 그건 전을 굽는 소리가 아니라, 계절이 익는 소리다. 그녀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끝으로 꾹 눌러 뒤집는다. 그 모든 동작이 오차 없이 이어질 때, 비로소 하나의 화전이 완성된다.
기억을 부치는 음식, 감정을 담는 전
그녀는 화전을 음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화전은 기억이에요. 어릴 땐 할머니가 해주시고, 결혼하고 나선 아이들과 만들었어요.
이건 먹는 것보다 함께 만드는 게 중요한 음식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화전을 주문 받지 않는다. 대신 체험이나 모임, 계절행사에서만 직접 가르치고 만든다. 그녀의 화전을 먹은 사람들은 “눈으로 먼저 먹고, 향으로 또 먹는다”고 말한다. 그건 화전이 단순히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감정의 층이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꽃을 입에 넣는 순간 잠시 멈춘다. 그건 예쁨 때문이 아니라, 그 꽃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말한다. “화전은 오래 두고 먹는 음식이 아니라,
기억을 남기고 사라지는 음식이에요.”
전통은 맛이 아니라 흐름이다
박 장인의 화전은 어떤 것도 정해진 틀이 없다. 계절마다 다르고, 꽃에 따라 색도 다르고, 반죽의 감촉도 바뀐다.
그녀는 화전 한 판을 부치면서도, 이 꽃이 지금 몇 부능선에 있는지를 본다. “꽃이 피었어도, 아직 꽃술이 노란색이면 더 기다려야 해요.” 그녀는 꽃을 따지 않고, 꽃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전통이라는 건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지켜야 할 방법이 아니라,
지켜야 할 흐름을 따라가는 일. 박희순 장인은 누군가에게 화전을 만드는 법을 알려줄 때 항상 한마디를 덧붙인다. “맛을 기억하지 말고, 만들던 그날의 냄새를 기억하세요.” 그 말처럼 그녀가 만드는 화전은 한 끼의 음식이 아니라, 한 계절의 감각을 불러오는 도구가 된다. 그 꽃잎 위에 놓인 시간은 아주 짧지만, 그 울림은 오래 남는다.
꽃을 따는 일, 자연을 허락받는 일
박희순 장인은 꽃을 따는 일을 ‘허락받는 일’이라 말한다. 진달래가 산기슭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계절이면 누구나 꽃을 꺾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꽃잎을 만지기 전, 늘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 바람을 느끼고 꽃잎에 벌이 머물렀는지, 꽃술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를 본다. “사람도 때가 있듯, 꽃도 누군가에게 보여야 할 때가 있어요. 화전은 그걸 알아채야 만들 수 있어요.” 그녀는 꽃을 따지 않는다. 그저 받아온다고 말한다. 그 말은 꽃이 피었다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꽃을 따는 순간에도 그녀는 줄기 가까이는 자르지 않는다. 가장자리 꽃잎 한두 장만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그래서 그녀가 다녀간 산에는 빈 가지가 없다. 이 작은 배려는 음식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녀에게 화전은 자연을 꾸미는 게 아니라, 자연이 허락한 조각을 빌려오는 일이기 때문이다.꽃잎을 쓸 때도 겹치지 않게, 물에 살짝 씻고 한지에 올려 말린다. 그 말린 꽃잎 하나하나에 계절의 숨결이 남는다. “꽃잎을 무심히 다루면 꽃이 전 안에서 울지 않아요. 사람처럼 다뤄야 해요. 겹치지 않고, 눌리지 않게.”
전통은 모양이 아니라 감각의 기록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묻는다. “화전 만드는 법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그녀는 대답한다. “할머니 손 보면서 배웠지, 책이나 유튜브로 배운 건 없어요.”박희순 장인에게 화전은 ‘배운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한 것’이다.
어릴 적 봄마다 부엌에서 기름 냄새가 돌면 그건 꽃잎을 부칠 때라는 신호였다. 그 향은 아직도 그녀의 손에 남아 있고 그때의 소리는 지금도 그녀가 기름을 두를 때마다 되살아난다. 그래서 그녀는 레시피를 쓰지 않는다. 손의 느낌, 반죽의 탄성, 바람의 속도, 꽃의 향기…
그 모든 것이 레시피다. 화전 한 판이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이지만 그 20분을 준비하기 위해 그녀는 하루를 쓴다. 꽃을 따고, 반죽을 빚고, 온도를 맞추고, 기름을 고르고, 접시를 준비한다. 그녀는 말한다. “요즘 음식은 겉은 화려한데 안은 비어 있어요.
화전은 그 반대예요. 겉은 조용하지만 안은 꽉 차 있어요.” 이 말은 단지 음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가 전통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전통이란 모양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 감각을 이어가는 일이다. 꽃이 피는 이유, 계절이 흐르는 방향, 그리고 손끝의 조심스러움까지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전통이라는 것을 그녀는 하루하루 화전 위에서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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