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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영주 전통 풍경(風磬) 장인, 바람에 마음을 다듬는 소리를 만들다

경북 영주 소백산 자락, 오래된 느티나무가 둘러싼 집 한 채. 바람이 스치면 그 집 처마 끝에서 고운 소리가 난다.
맑지만 날카롭지 않고, 짧지만 여운이 길다.그 소리의 정체는 바로 풍경(風磬). 금속이나 나무로 만든 작은 추(錘)가 바람에 흔들리며 울려 퍼지는 우리 전통의 자연 악기다. 이곳에서 30년째 풍경을 만드는 이는 손재만 장인, 풍경 하나하나를 손으로 깎고 두드리며 바람 속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바람이 말은 없지만, 풍경이 그 말을 대신해줘요.” 그가 만든 풍경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소리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정리하고,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조용한 악기다.

 

바람을 붙잡는 손 – 풍경의 재료와 구조

손재만 장인은 풍경을 만들기 위해 먼저 나무와 금속을 고른다. 그는 “소리를 만드는 건 재료가 아니라 재료의 조화”라고 말한다.
풍경의 몸체는 주로 소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등 가볍고 결이 고운 나무로 만든다. 이를 둥글거나 납작하게 다듬고, 그 아래에 금속판이나 유리, 대나무, 조개껍데기 등을 달아 울림을 만든다. 금속은 청동이나 황동, 철을 얇게 펴 두드린다. 손 장인은 두께 0.2mm까지 두드리는 기술을 갖고 있다. 너무 얇으면 날카롭고, 너무 두꺼우면 먹먹하다. 그는 “바람이 움직이듯 소리도 흔들려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풍경의 크기, 재질, 고리의 길이까지 모두 손으로 계산해 조율한다. 바람개비처럼 움직이는 날개는 종이, 대나무, 천 등으로 만든다. 그 날개가 바람을 받아 움직이고, 그 힘으로 작은 쇠구슬이나 나무심이 몸체를 쳐 소리를 낸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무와 금속을 맞춰보며 “오늘 바람엔 이 소리가 어울리는지”를 듣는다. 그 감각은 계산보다 경험이고, 손보다 귀의 기술이다.

 

소리를 깎는 시간 – 바람과 손의 대화

풍경은 ‘두드림’보다 ‘울림’이 중요하다. 손 장인은 풍경 하나를 만들며, 세 번 이상 ‘귀 맞춤’을 한다.
처음은 재료 고를 때, 두 번째는 조립할 때, 세 번째는 바람에 걸었을 때. 그는 귀를 바람 쪽으로 기울이고 그 안에서 튀는 소리, 부딪힘의 강도, 여운의 길이를 듣는다. 그의 작업장에는 늘 조용한 음악처럼 은은한 풍경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소리를 깎기 위해 연장을 쓰지 않는다. 손으로 표면을 다듬고, 손톱으로 눌러 진동을 느낀다. “소리는 눈보다 귀가 먼저 알거든요.” 그 말처럼 그는 귀로 완성도를 결정한다. 울림이 짧으면 길이를 늘리고, 여운이 너무 길면 무게를 늘려 조정한다. 가장 섬세한 작업은 '고리 맞춤'이다. 풍경이 흔들리는 중심축, 고리를 거는 줄의 길이가 1cm만 달라도 소리가 달라진다. 그는 줄을 다는 데만 하루를 쓰기도 한다. 왜냐하면 바람이 가장 먼저 건드리는 것이 그 고리이기 때문이다. “고리가 흔들리는 방향이 곧 소리의 방향이에요.”

소백산 바람을 기억하는 풍경이 처마 밑에 걸려 있는 장면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어야 풍경이 완성된다

그는 풍경을 만들면서 늘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을 떠올린다. “어느 처마 밑에 걸릴지, 어떤 방 안에 울릴지, 그 풍경 소리를 누가 가장 먼저 들을지를 생각하죠.” 그래서 그의 풍경은 모두 다르다. 같은 재료라도, 만든 날의 기온과 습도, 그날 불어온 바람에 따라
소리의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요즘은 요양원이나 명상센터, 산사에서도 그의 풍경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기계로 만든 풍경보다
손으로 만든 소리가 더 ‘조용하다’는 이유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서 평온을 찾는다. 실제로 그의 풍경은 불면증, 불안장애를 겪는 이들에게 마음의 쉼표가 되어준다. 그는 풍경을 판매할 때 설명서를 넣지 않는다. 대신 작은 메모를 넣는다. “이 풍경은 소백산 바람을 기억합니다.” 그 한 줄의 기록이 풍경에 담긴 감정이다. 그는 말한다. “풍경은 들으라고 만든 게 아니라, 마음이 쉬라고 만든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드는 기술 – 바람, 소리, 그리고 사람

풍경은 사라지는 소리다. 불빛처럼 타지도 않고, 색처럼 남지도 않는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에 조용한 잔상을 남긴다.
손재만 장인은 매일 작업장을 열고, 대패질을 하지 않아도 손을 움직이며 다음 바람에 울릴 소리를 기다린다. 그의 작업대엔 아직 조립되지 않은 풍경의 몸체들이 소리를 기다리듯 조용히 놓여 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말한다. “이건 어제 바람이 남긴 느낌이에요.” 그가 만든 풍경은 바람에 따라 울리지만, 사람에 따라 울림이 다르다. 그래서 그는 풍경을 팔지 않는다. “그냥 가져가라고 해요. 대신, 걸 곳을 제대로 정하세요.” 그가 말하는 걸 곳이란 조용한 담장 아래, 오래된 처마 밑,  혹은 잠 못 드는 이의 창가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바람이 지나가고, 소리가 울리고, 마음이 잠시 멈춘다. 그 소리의 시간은 짧지만기억은 오래 남는다.

 

바람은 지나가도, 소리는 남는다

손재만 장인이 만든 풍경은 누군가의 하루에 아주 작게 스며든다. 그 소리는 벨소리처럼 알리지도 않고, 음악처럼 리듬을 가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창문이 흔들리는 순간, 문득 들려오는 그 짧은 울림은 복잡한 마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멀어진 기억을 조용히 불러온다. 그가 매달은 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바람이 만든 ‘쉼’이었다. 그래서 그의 풍경은 사라질수록 마음에 남는다. 그가 매달은 수많은 소리들처럼, 우리도 어쩌면 하루의 끝에서 작고 고요한 울림 하나쯤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누군가는 멀어진 누군가를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잊고 있던 자기 자신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