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은 가을이면 마을 전체가 사과 향으로 가득해진다. 아침 이슬 머금은 사과밭, 낮 햇볕에 반짝이는 잎, 그리고 노을빛을 닮은 붉은 사과들이 하나둘 수확된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사과를 수확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낸 사과를 다시 손질해 햇볕 아래 천천히 말리는 장인이 있다. 이름은 이금자, 올해 일흔을 넘긴 그는 30년 넘게 청송에서 사과말림 하나로 시간을 살아냈다. 시장에는 공장에서 만든 사과칩, 건조 과일이 넘치지만, 그가 만드는 사과말림은 다르다. 그 속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계절의 온도, 손의 감각, 바람의 무게가 깃들어 있다. 그는 말한다. “과일은 냉장보다 햇빛을 기억해야 해요. 사과가 익는 게 아니라, 시간이 졸아드는 거예요.” 그의 사과말림은 그래서 달지 않지만 깊고, 말랐지만 부드럽고, 오래됐지만 신선하다.
청송 사과말림은 한입 크기의 햇살 – 사과 손질에서 말리기까지
사과를 말린다는 건 단순히 수분을 빼는 일이 아니다. 이금자 장인은 “사과를 눕히기 전에 손으로 한 번 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과는 품종마다 수분량이 다르고, 수확 시기에 따라 당도와 질감도 달라 말리는 속도와 방법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청송에서 주로 말리는 사과는 부사, 홍옥, 아오리.이 장인은 사과의 피부처럼 단단한 껍질을 부드럽게 깎고,
심지를 빼는 칼날도 일반 칼이 아닌 한식 조각칼을 사용한다. 조각칼의 예리한 결이 사과의 결을 따라가야,
말랐을 때 갈라지지 않고 촉촉한 속살이 유지된다. 손질된 사과는 일정한 두께로 썬다. 두껍게 썰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얇게 썰면 금방 마르지만 식감이 사라진다. 그녀는 사과의 상태에 따라 6mm에서 1cm 사이로 두께를 조절한다.
“사과마다 오늘 컨디션이 있어요. 어제는 단단했는데 오늘은 무르죠.
그래서 손이 알아야 해요.” 그녀는 슬라이스한 사과를 대나무 소쿠리에 가지런히 놓고, 햇살이 가장 좋은 남향 바람 골목에 하루 종일 펼쳐 둔다. 그녀는 인공건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햇빛은 온도만 있는 게 아니라 결이 있어요." 공기랑 같이 움직여야 색도 예쁘고 맛도 살아 있죠.” 바람이 너무 세면 그늘로 옮기고,
습도가 높으면 해가 들더라도 말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좇는다. 사과를 말린다는 것은 결국 햇살과 손이 함께 만드는 숙성이다.
바람 속에서 천천히 익는 단맛 – 자연 건조의 원칙
청송의 가을 햇볕은 특별하다. 맑고 건조하면서도 따가운 기운이 사과 속 수분을 천천히 빼낸다. 이금자 장인은 사과를 한 번 말리고 끝내지 않는다. 반나절은 햇빛에, 저녁엔 그늘에서, 다음 날 다시 햇빛에. 이 과정을 3~5일간 반복한다.
그녀는 “사과는 햇볕을 오래 보지 않아야 해요. 과하게 보면 색이 탁해져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사과를 들어 손바닥에 얹어 색과 무게를 느껴본다. “무게가 줄었는데 껍질이 탱탱하면 지금이에요.” 그 감각은 수십 년 손에서 길러진 내공이다. 과학 장비로는 측정할 수 없는 감각. 그녀는 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지금이 말림의 끝’이라는 순간을 알아챈다.
사과를 말린 후에는 밀랍종이에 하나하나 싸서 저장고에 넣는다. 이 작업은 그녀가 가장 공들이는 마지막 단계다. 과일은 쉽게 냄새를 흡수하기 때문에, 사과 본연의 향을 지키기 위해 종이도 향 없는 무산지로 쓴다. 밀봉할 때는 공기를 완전히 뺀다. “사과는 숨을 쉬게 해선 안 돼요. 숨 쉬면 금방 늙어요.” 그녀의 저장고는 서늘하고 어두운 지하방. 벽돌과 흙이 만들어내는 습도가 사과말림에 제일 잘 맞는다.
맛보다 기억을 남기는 간식 – 시간을 말리는 마음
이금자 장인이 만드는 사과말림은 맛보다 기억에 남는다. 한입 넣으면 사각거리지 않고, 씹히는 감촉 사이사이에 사과가 지닌 여운이 남는다. “사과는 어릴 적 손바닥 안에 쥐던 간식이었죠. 한 개를 오랫동안 먹었어요. 말린 사과는 그 시간을 다시 느끼게 해줘요.” 그녀는 사과를 말리며 사람의 시간까지 함께 졸여낸다. 그래서 그녀의 사과는 보관이 오래된다고 해도
‘묵은 맛’이 아니라 ‘익은 맛’이 된다. 그게 햇빛으로 만든 숙성의 차이다. 요즘은 그녀의 손녀도 함께 사과를 말리며 기술을 배우고 있다. 그녀는 기술보다 “사과를 대하는 마음”을 먼저 가르친다. “사과는 제멋대로 못 다뤄요. 사람도, 과일도 다 감정이 있어요. 말릴 땐 그걸 느껴야 해요.”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사과말림은 간식이 아니라 한 계절이 녹아든 감정의 조각이다. 청송의 햇살, 노란 흙길, 대나무 소쿠리, 그리고 할머니의 손끝이 만들어낸 정직한 시간. 그 시간이 입 안에서 천천히 퍼질 때 우리는 단지 과일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온 한 사람의 속도를 먹는 것이다.
햇살에 남긴 기억, 한 조각의 시간으로 남다
이금자 장인의 사과말림은 단순한 수공예 먹거리가 아니다. 그건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이며,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해석이다. 공장에서 짧은 시간 안에 기계로 잘라내고 말리는 것과 달리 그녀의 방식은 하루의 온도와 바람, 사람의 손, 그리고 기다림으로 사과를 빚는다. 그 결과 만들어진 한 조각의 말린 사과는, 단지 단맛이 아닌 ‘느린 기억’을 담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르고 간편한 음식을 찾는다. 그러나 장인이 만든 이 사과 한 조각은 그런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한다. 씹을수록 깊어지는 맛, 오랜 시간 햇볕을 머금은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손으로 빚어진 그 감각은 무엇을 오래 지킨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다시 알려준다. 그녀의 말처럼, “사과는 말라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면 그 과정을 함께 바라보는 우리도 조용히 익어가는 중일 것이다. 이 글은 단지 한 장인의 기술을 소개하는 글이 아니다. 사라지는 전통, 잊혀지는 손의 감각, 그리고 계절과 감정을 함께 엮는 진짜 콘텐츠를 담고자 했다. 청송이라는 지역, 사과라는 익숙한 재료,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한 사람의 철학이 만났을 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이 글이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검색 결과에서, 혹은 어느 느긋한 저녁에 발견되어 조금은 조용한 영감과 감탄으로 머물기를 바란다. 그 한 조각의 사과처럼, 오래도록 남고, 천천히 퍼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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