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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예산 전통 천연염색 장인, 식물의 빛으로 시간을 물들이다

충남 예산의 조용한 들녘 끝, 고요한 바람과 함께 색이 번지는 공방이 있다. 그곳은 붉지 않지만 선홍빛이 떠돌고, 푸르지 않아도 쪽빛이 머문다. 흰 천을 드리운 작업대 위에는 누군가가 뿌리와 잎, 열매로 만든 색이 조용히 말라가고 있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천연염색을 해온 장인 박연주 씨는 “색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화학약품 없이 오직 식물, 물, 햇빛, 바람만으로 천에 색을 입힌다. 단순히 천을 물들이는 일이 아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색을 빌리는 일이다. 박연주 장인에게 염색은 공예 이전에 ‘기다림의 기술’이며, 색은 사람의 성격을 닮은 자연의 말이다. 그녀가 만든 옷과 천, 손수건 하나하나는 어느 나뭇잎, 어느 계절, 어느 시간에 태어난 빛의 조각들이다.

 

천연염색 계절을 읽고 색을 고른다 – 염색은 식물과의 대화

염색의 첫 단계는 식물을 고르는 일이다. 그녀는 식물마다 계절과 기온, 채취 시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쪽은 여름 한낮보다 이른 아침 이슬이 맺힌 상태에서 수확해야 푸른 빛이 곱게 올라오고, 치자나 홍화는 너무 무르기 전에, 말리기 전날 비가 오지 않아야 선명한 노란빛이 나온다. 그녀는 계절마다 다이어리를 써서 식물의 상태와 날씨를 기록한다. 그것은 색을 예측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기록이다. “작년에 6월 초에 홍화가 좋았는데, 올해는 열흘 늦었어요. 날씨가 달라졌거든요.” 그녀의 말은 단순한 장인정신을 넘어, 기후와 생태, 땅의 숨결까지 감각으로 읽는 사람의 언어에 가깝다.

채취한 식물은 곧바로 삶거나 절굿공이로 찧어 염액을 만든다. 이때도 온도와 시간, 사용하는 물의 성질이 색의 농도와 밝기를 바꾼다. 예산처럼 물이 부드러운 지역은 색이 깊게 스며들기 좋아, 염색장으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라 그녀는 말한다. “한 지역의 땅과 물이 만든 색은 그 땅 고유의 빛을 가져요.” 그래서 그녀는 예산에서 염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과 함께 염색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땅과 물, 바람까지 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이, 그녀의 염색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햇빛 아래 말려지는 천연 염색 천과 바람에 흔들리는 실루엣

손끝의 감각으로 물을 흔든다 – 색을 머금는 천의 시간

염액을 만든 후 천을 담그는 과정은 염색의 절정이다. 하지만 박 장인은 “이때는 기술보다 감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천이 색을 먹는 데는 일정한 리듬이 있다. 너무 오래 담그면 색이 탁해지고, 짧으면 색이 겉돌기만 한다. 그녀는 손으로 천을 조심스럽게 풀어가며, 색이 골고루 배이도록 염액을 천천히 섞는다. 그 손놀림은 마치 국을 젓듯 자연스럽고, 빛을 다루는 것처럼 신중하다. “천이 말해요. 지금 더 기다리라고. 또는 꺼내도 된다고.”

그렇게 천을 꺼낸 후, 그녀는 햇볕 아래 널어놓는다. 햇볕과 바람이 천을 말리는 동안, 색도 조금씩 변한다. 그 변화는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아름답다. 어떤 색은 진해지고, 어떤 색은 연해지며, 어떤 색은 예상보다 더 깊은 농도를 갖는다. 그녀는 이 과정을 ‘빛과 바람의 숙성’이라고 부른다. 그 숙성의 시간은, 사람에게도 차분한 기다림을 가르쳐준다. “급한 마음으론 절대 좋은 색이 안 나와요. 좋은 색은 늘 조용하게 태어나요.”

그녀는 염색을 할 때마다 같은 색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똑같은 식물이어도, 햇빛의 각도, 물의 온도, 바람의 속도, 그리고 사람의 마음까지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연염색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날의 자연과 사람, 그리고 감정이 만들어낸 ‘기록’에 가깝다.

 

색이 아닌 기억을 입히는 손 – 천의 표정을 읽는 장인

염색한 천이 완성되면, 그녀는 천을 들고 빛에 비춰본다. 눈으로 보는 색과, 빛에 투과되는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색이 누구에게 닿을지를 생각하며, 손수건을 자르고 옷감을 천천히 접는다. 그녀는 염색을 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많이 떠올린다. “이 색은 누군가의 여름일지도 모르고, 어떤 이의 겨울 속 따뜻함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그녀는 대량 생산을 하지 않는다. 매번 색이 다르고, 천이 다르고, 바람과 햇빛이 다른 날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장은 공장이 아니라 색이 태어나는 작은 숲 같고, 그 숲 속에는 한 땀 한 땀 인간의 온도가 깃들어 있다. 요즘은 그녀에게 염색을 배우러 오는 젊은이들도 있다. 속도를 줄이고 감각을 배우려는 이들이다. 그녀는 “색을 만드는 법보다, 색을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말한다. 예산의 햇살, 풀냄새, 그리고 식물들이 전하는 고요한 속도. 그녀는 그것을 천에 담아 우리에게 건넨다. 단지 예쁜 색이 아니라, 자연이 오래도록 빚어낸 빛의 언어를.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람마다 다 다른 색을 가지고 있잖아요.
염색도 똑같아요. 어느 색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자기에게 어울리는 색을 알아가는 일이에요.” 그 말처럼, 천에 남은 색은 한 사람의 기억이 되고 자연과 함께 빚어진 감정의 흔적으로 오래 남는다.

 

색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입힌 것이다

박연주 장인의 염색은 단순한 색의 작업이 아니라, 시간이 빚은 기록이다. 그녀는 식물 하나를 고를 때도 계절을 살피고, 물을 데울 때도 바람을 느끼며, 천을 물들일 때도 손끝의 감각을 먼저 믿는다. 그렇게 완성된 색은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어떤 날의 온도와 공기, 감정이 함께 담긴 기억의 층이 된다. 누군가는 그 천을 손에 쥐고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조용히 접어 가방에 넣으며 여행의 한 조각처럼 간직할 것이다.

그녀는 “색은 만들기보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삶의 자세와도 닮아 있다. 급하게 채우기보다, 천천히 스며들게 하고, 억지로 덮기보다 자연스럽게 번지게 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만드는 염색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조용한 감동을 품고 있다. 이 글은 단순히 장인의 삶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잊혀지는 손의 기술과 자연과의 조화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천연염색이라는 전통 공예가 주는 느린 속도와 감각의 깊이는 오늘날 우리가 잊고 지낸 것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누군가는 이 장인의 작업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을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시각적 이미지와 정보의 색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런 시대일수록 더 많은 이들이 자연이 만들어낸 빛의 색, 손으로 완성된 색, 그리고 감정과 기억을 담은 색을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 속엔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마음을 쉬게 하는 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그런 색을 알아보는 첫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박연주 장인의 천처럼, 누군가의 하루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조용한 감정의 결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