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의 한적한 시골 마을, 논과 밭 사이에 오래된 한옥 한 채가 있다. 바람결에 뚝뚝 울리는 둔탁한 북소리가 들려온다. 누구는 그것이 축제 리허설이라 말하고, 누구는 민속 예술단이 연습 중인 줄 안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 소리는 누군가가 북의 울림을 시험하듯 천천히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소리다. 소리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진동과 여운을 나무와 가죽으로 빚어내는 사람. 바로 이곳에서 40년 넘게 전통 국악기를 제작해온 장인 김태석 씨다. 그는 손으로 악기를 만들면서 사람의 마음까지 울리는 일을 해왔다.
그는 국악기를 “보이지 않는 감정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말보다 먼저 소리로 울고 웃었다. 악기는 그 소리의 형상을 붙잡아주는 도구이고, 그 안에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서는 감각이 필요하다. 김 장인은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장과 방음실, 그리고 건조실에서 보낸다. 그에게 있어 북 하나, 장구 하나, 해금 한 대를 만든다는 건 나무와 가죽, 철사와 실 사이에서 기운과 진동을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기계처럼 복제된 소리가 아닌, 사람 손에서 살아나는 떨림. 그 떨림이 있어야 진짜 소리가 만들어진다.
나무는 울림을 기억한다 – 악기의 몸통이 태어나는 과정
국악기를 만드는 첫 번째 재료는 나무다. 그는 대부분의 북과 장구를 만들 때 참나무나 오동나무, 때로는 느티나무를 쓴다. 산에서 직접 고른 나무를 가져와 최소 2년 이상 건조시킨다. 그가 말하는 좋은 나무란 “결이 곧고, 속이 단단하면서도 진동이 부드럽게 퍼질 수 있는 나무”다. 나무는 단단하면 울림이 멀고, 너무 무르면 진동이 흡수돼 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는 손가락 마디로 나무를 두드리며 안쪽의 울림을 듣는다. 그것은 나무가 가진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이고, 그 소리에 따라 어떤 악기로 쓸지를 결정한다.
건조가 끝난 나무는 깎고 다듬어 몸통을 만든다. 나무를 깎는 작업은 무조건 얇고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김 장인은 “소리는 무게와 중심으로 울린다”고 말한다. 장구의 경우, 양쪽 소리가 다르게 울려야 하기 때문에 무게 중심과 벽 두께를 섬세하게 조절한다. 북은 안쪽이 단단해야 하며, 해금은 나무 몸체 속 공간의 비율이 소리를 결정한다. 모든 작업은 손으로 이루어진다. 전기톱이나 기계는 사용하더라도 마감은 반드시 손칼과 줄, 사포로 마무리한다. “기계는 편하긴 하지만 나무를 넘겨버려요. 손은 나무를 따라가죠.”
가죽은 살아 있는 표면이다 – 음색을 결정하는 민감한 작업
악기의 몸통이 만들어지면, 다음은 가죽이다. 김 장인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 바로 이 가죽이다. 북이나 장구는 대부분 소가죽이나 말가죽을 사용하며, 이 가죽의 상태가 곧 소리의 질을 결정한다. 그는 가죽을 말리거나 다루는 데 하루 이상 걸린다고 말한다. 햇빛을 피해 서늘한 그늘에서 말리고, 수분을 적절히 남겨야 한다. 수분이 너무 많으면 소리가 뭉개지고, 너무 말라버리면 장력이 부족해 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는 손바닥으로 가죽을 문질러보며 "살아 있는 촉감"을 느낀다. 이 감각은 몇십 년을 해오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경험치다.
가죽을 악기 몸통에 씌우는 작업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북은 못으로 가죽을 박아 고정하고, 장구는 실과 줄로 조여 가죽을 고정한다. 이때 조임의 강도는 음의 높낮이를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김 장인은 수십 번 손으로 줄을 당기고, 조이고, 풀기를 반복한다. 이 작업은 단순한 조립이 아니라 음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한 줄을 조금만 더 당기면 소리가 달라져요. 그 조화가 맞아야 진짜 소리가 나죠.” 그래서 그는 악기를 완성한 뒤에도 며칠 동안 건조시키며 변화하는 음색을 지속적으로 테스트한다.
소리는 손의 감정으로 빚어진다 – 진짜 악기가 완성되기까지
악기를 만드는 일이 마무리되는 건 소리를 확인한 뒤다. 그는 만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거나, 연주자에게 부탁해 확인한다. 북은 손으로, 장구는 채로, 해금은 활로 긋는다. “소리를 들어봐야 내가 만든 게 진짜인지 알아요. 모양만 악기여도 소리가 없으면 그건 그냥 장식이에요.” 그는 소리를 들으며 미세하게 손을 봐가며 마지막 조정을 한다. 마치 조각가가 마지막 한 번의 칼질로 얼굴의 표정을 결정하듯이 조정한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전통 국악기를 수제 방식으로 만드는 장인이 매우 드물다. 기성 악기는 값이 싸고, 빠르게 생산되며, 소리의 균일성도 일정하다. 그러나 김 장인은 말한다. “모든 게 같은 소리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연주하는 거예요. 악기도 사람처럼 다 달라야 해요.” 그는 연주자마다 손의 힘, 호흡, 연주의 결이 다르기 때문에, 악기도 그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고객들은 대부분 전문 국악인들이다. 어떤 이는 자신만의 해금을 위해, 어떤 이는 손에 맞는 장구를 위해 수개월을 기다린다. “내가 만든 악기를 누군가가 오래 연주해주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어요.”
소리를 남긴다는 것 – 사라지지 않는 기록의 의미
그는 악기를 만들며 수십 권의 기록노트를 남겼다. 나무의 종류, 가죽의 상태, 당긴 줄의 수치, 연주자 피드백까지 일일이 손으로 적는다. 그는 이 기록들이 “소리의 족보”라 말한다. 후대에 국악기를 만들 사람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그는 이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누군가 이걸 보고 ‘아, 이런 방식이 있었구나’ 하고 다시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죠.”
김 장인의 하루는 늘 같은 소리로 시작하고 같은 침묵으로 끝난다. 아침엔 나무를 만지고, 낮에는 가죽을 다듬고, 저녁이면 가만히 앉아 자신이 만든 북 하나를 조용히 두드린다. 그 소리는 멀리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작업장 안에 앉은 그의 가슴에는 맑고 깊은 진동으로 남는다. 그는 오늘도 말없이 나무와 가죽을 만지고 있지만,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다듬고, 기억을 두드리는 일에 가까운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악기는 그냥 소리를 내는 도구가 아니다. 그건 마음이 진동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이며, 그 진동 속에 삶의 속도와 감정이 깃든다. 그는 말한다. “소리를 오래 듣고 있으면,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겠고, 뭐가 고마운지도 알겠어요. 그게 진짜 좋은 소리죠.” 이런 말을 들으면, 김 장인이 만든 악기를 통해 연주되는 모든 국악이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게 사람들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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