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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거창 목기 장인, 나이테 따라 깎아낸 손의 곡선

경상남도 거창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땅이다.
이곳에선 오래전부터 소나무, 밤나무, 느티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라왔다.
그 나무들 중 몇은 잘린 후에도 사람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다.
목기로, 그릇으로, 숟가락으로.

거창에서 수십 년간 나무를 다듬어온 한 장인은 말한다.
“나무는 다치면 흔적이 남아요. 그래서 나이테마다 감정이 있어요.”
그가 만드는 목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나무가 살아온 시간을 읽고, 그 시간을 따라 깎아낸 손의 곡선이다.
이 글은 나무의 결과 장인의 숨결이 어우러진 거창 수제 목기의 세계를 따라간다.

 

목기 장인이 사용하는 나무는 태어난 순서대로 쓴다 – 재료에서 시작되는 손의 예의

목기는 재료에서 시작된다.
그는 나무를 시장에서 사지 않는다. 반드시 산에서 직접 고른다.
“목기는 겉보다 속이에요. 살아온 환경이 나무결에 다 남아 있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느티나무다.
단단하면서도 결이 곱고, 자를 때 소리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잘린 단면에서 먼지 냄새가 아니라 흙냄새가 나면 좋은 나무예요.”

그는 나무를 베어오면 1년 이상 건조시킨다.
통풍이 잘 되는 그늘 아래 나이테가 갈라지지 않도록 세워서 보관한다.
이 과정을 “나무가 죽음을 인정하게 하는 시간”이라 부른다.
“급하게 자르면 속이 울어요. 울음소리가 결에 남아요. 그럼 갈라져요.”

잘 마른 나무는 크기와 용도에 따라 자른다.
이때 중요한 건 나이테의 방향과 굵기다.
나이테가 고르게 퍼진 쪽은 숟가락이나 젓가락에,
나이테가 거칠고 굵은 쪽은 도마나 쟁반에 쓴다.
그는 말한다. “사람도 나이 들수록 성격이 바뀌죠. 나무도 그래요. 안쪽과 바깥쪽이 달라요.”

거창 산골 작업실에서 소나무 느티나무를 깎고 있는 전통 목기 장인

결은 억지로 깎지 않는다 – 손이 읽는 곡선의 흐름

목기를 만드는 작업은 대패나 사포보다 손칼과 조각도를 더 많이 쓴다.
그는 기계 가공을 최소화한다.
“기계는 나무를 밀어버려요. 손은 따라가요. 그게 다르죠.”

가장 먼저 나무의 결을 읽는다.
나이테가 흐르는 방향을 손끝으로 느끼고, 어느 쪽으로 깎아야 결이 깨지지 않을지를 정한다.
“결을 거슬러 자르면 나무가 화를 내요. 결대로 깎으면 부드럽게 따라와요.”

숟가락 하나를 만드는 데도 몇 시간이 걸린다.
그는 두꺼운 나무 조각을 들고, 초벌 형태를 잡은 후, 안쪽을 파고 가장자리를 정리하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한다.
“가장자리 곡선은 혀끝에 먼저 닿는 부분이에요. 너무 얇으면 날카롭고, 두꺼우면 밉죠.”

그는 도마를 만들 때, 반드시 칼이 잘 서는 결 방향을 고려한다.
“칼자국이 덜 남는 도마는 결이 수직으로 잘라진 거예요. 그런 도마는 오래 써도 표면이 깨끗해요.”

모든 손길은 결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무를 자를 때, 자르기보다 따라가는 느낌으로 깎는다.
그는 말한다.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나무가 보여주는 걸 정리하는 거예요.”

 

나무의 숨결을 덮지 않는다 – 마감은 단순해야 깊다

목기의 마지막 공정은 마감이다.
기계식 제품은 코팅제를 바르거나 페인트를 입히지만,
그는 오직 들기름이나 천연 호두기름만 사용한다.

“기름은 숨을 막으면 안 돼요. 나무가 호흡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정도면 충분해요.”
그래서 기름칠은 하루에 한 번씩, 3일에서 5일간 반복한다.
“기름이 나무 속으로 스며들어야 마르면서 윤이 나요. 겉만 번지르면 금방 벗겨져요.”

기름을 바른 후, 그늘에 말리고, 거친 천으로 문지르며 광을 낸다.
이 과정을 ‘나무와의 마지막 대화’라고 부른다.
그는 말한다. “마지막까지 정성 들여야 그릇이 사람 손에서도 살아 있어요.”

그는 도장이나 상표도 찍지 않는다.
“내 이름보다 나무의 이름이 먼저 보여야죠.
목기는 주인 손에서 기름이 묻고, 음식이 닿으며 자기 색을 찾아요.”

그래서 그의 목기는 쓰면 쓸수록 진해지고, 빛난다.
처음엔 흐릿한 결이었지만, 수년이 지나면
나무가 살아온 흔적과 사람의 사용감이 겹쳐지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릇이 된다.

 

나무는 사람의 시간을 닮는다 – 물려줄 수 있는 도구

그는 목기를 만드는 일을 “도구를 만들면서 시간을 새기는 일”이라고 말한다.
“숟가락 하나에도 내가 깎은 흔적이 남고,
그걸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다르게 닳아요. 그게 아름다워요.”

그의 고객 중에는 조용한 찻집, 전통 요리사, 도시의 젊은 부모들도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이 목기는 마음을 천천히 쓰게 만들어요.”
그는 그것이 나무의 기운이 사람에게 전해지는 방식이라 믿는다.

최근 그는 '손으로 배우는 목기 체험교실’을 열었다.
하루에 두 명만 받고, 각자 나무 조각 하나씩을 들고 시작한다.
거기엔 정해진 디자인도, 정답도 없다.
그는 말한다. “그저 나무를 만져보고, 그 안에서 어떤 모양이 나올지 기다리면 돼요.”

오늘도 거창 산 아래 그의 작업실에는 나무 냄새, 깎는 소리, 그리고 조용한 숨결이 흐른다.
그가 만드는 목기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다.
사람의 손과 마음, 그리고 나무가 겪은 계절들이 함께 깎여 나온, 시간의 그릇이다.

 

손이 만든 물건은 시간을 기억한다

그는 목기를 ‘시간이 담기는 그릇’이라 말한다.
“나무는 나보다 오래 산 존재예요. 내가 깎아서 만든다고 해도, 그 안에 이미 살아온 시간이 있어요.”
그래서 그는 하나의 나무를 자를 때, 그 나무가 자라온 환경과 결을 읽는 것을 먼저 한다.
산비탈에서 자란 나무는 결이 거칠고 뒤틀려 있지만, 오히려 그런 나무는 손에 닿았을 때 더 따뜻한 감촉을 준다.
“사람도 그렇잖아요. 고생한 사람이 정이 깊어요. 나무도 똑같아요.”

그는 “목기는 손을 위한 도구이자, 손이 남기는 도구”라고 말한다.
도마에는 칼자국이 남고, 숟가락은 입술 모양을 따라 달아진다.
젓가락 끝은 오래 쓸수록 닳지만, 그 닳은 자국이 바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자 이 목기가 존재했던 이유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시간이 지나 닳고, 깨지고, 기름에 얼룩이 져도 그건 흠이 아니라 역사예요.
오히려 기계로 만든 새 물건보다, 그렇게 변한 목기가 더 아름답죠.”

한 부부가 10년 전에 그의 목기로 결혼 선물을 받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식탁에서 그 그릇을 계속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만든 나무가 그 집 아이의 밥을 처음 받아줬고,
지금도 아버지 밥을 담고 있다니, 그 나무는 참 잘 자랐네요.”

목기는 그렇게 사람 곁에 머물며 시간을 기억하는 물건이다.
그래서 그는 목기를 팔 때, "이건 쓰이는 순간부터 더 예뻐집니다"라는 말을 함께 건넨다.
그 말 안에는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입, 마음과 생활 속에서 자라나는 도구라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