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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울릉도 호박엿 장인, 파도 소리에 눌러붙은 달콤한 시간

 울릉도는 빠르지 않다. 배로 들어가야 하고, 날씨에 따라 머무는 시간도 달라진다. 섬의 속도에 맞추다 보면, 어느새 걷는 걸음도, 말의 속도도 느려진다. 이 섬에는 느린 만큼 깊은 단맛을 가진 음식이 있다. 바로 호박엿이다.
울릉도의 호박엿은 단순한 전통 간식이 아니다. 섬에서 자란 단호박, 해풍에 말린 엿기름, 그리고 수십 시간을 저어 만든 손의 기록이다. 이 엿을 30년 넘게 만드는 장인은 말한다. “엿은 센 불에서 못 만들어요. 천천히 눌러붙게 해야 맛이 나요.”
그가 만드는 호박엿은 기계가 아닌 손과 시간으로 빚은 음식이며, 울릉도의 공기와 바다 내음, 섬사람의 손끝이 눌어붙은 달콤한 기억이다. 이 글은 울릉도 호박엿 장인의 정성과 한 입 속에서 녹아내리는 섬의 시간을 따라간 이야기다.

 

호박엿의 호박은 뿌리에서 온다 – 엿의 시작은 재료 고르기부터

 그가 쓰는 단호박은 울릉도 현지에서 자란 것이다. 비탈진 밭에서 자란 호박은 크지 않지만, 살이 단단하고 당도가 높다.
그는 “육지 호박은 크고 예뻐도 맛이 약하고, 울릉도 호박은 작지만 단맛이 꽉 찼다”고 말한다. 섬 특유의 토양과 해풍이 단맛을 응축시키기 때문이다. 수확한 호박은 껍질을 까고 씨를 제거한 뒤, 찜솥에서 익힌다.
그는 물을 거의 쓰지 않고 찐다. “물을 많이 넣으면 단맛이 빠져요. 호박 그대로의 단맛을 살려야 엿이 깊어지죠.”
찐 호박은 체에 내려 섬유질을 곱게 걸러내고, 따로 보관한다. 엿기름은 직접 만든다. 보리를 싹 틔운 뒤 말리고, 방앗간에서 빻는다.
이 엿기름이 호박의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중요한 열쇠다. “좋은 엿기름은 손에 쥐었을 때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요.”
그래서 그는 보리부터 자라고 틔우는 전 과정을 손수 관리한다. 이렇게 준비된 재료들을 큰 가마솥에 담고, 천천히 섞기 시작한다.
“엿은 불보다 손이에요. 잘 젓는 게 맛을 결정해요.” 첫 국자는 재료의 합이고, 이후 수천 번의 저음이 엿의 농도를 만들어낸다.

 

엿은 젓는 것이 아니라 눌러 붙이는 일 – 불과 손의 대화

 호박엿을 만드는 과정은 하루가 걸린다. 불은 세면 안 된다. 약한 불에 수 시간 동안 고르게 저어야만 탄 맛 없이 눌러붙는 깊은 단맛이 생긴다. 그는 말한다. “센 불은 겉만 익히고 속을 망쳐요. 엿은 중심이 익어야 해요.” 젓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팔과 손목, 어깨의 감각이 모두 중요하다. 계속 같은 방향으로 저으면 엿이 뭉치고, 너무 자주 방향을 바꾸면 실처럼 흐르지 않는다.
“엿은 물처럼 흘러야 해요. 그래서 나는 손으로 젓지만, 마음으론 물결을 따라가요.” 엿이 점점 졸아들며 황금빛을 띠면, 그는 온도를 살핀다. 기계 온도계 대신 나무주걱에 묻힌 엿의 흐름, 끈기의 길이, 끓는 기포의 모양을 본다.
“기계는 맛을 몰라요. 눈이랑 혀가 더 정확하죠.” 끓인 엿은 넓은 나무판 위에 부어 식힌다.
이때 공기와 닿으며 엿은 천천히 굳기 시작한다. 그는 식은 엿을 손으로 쭉쭉 늘려 맥을 만든다.
“이 늘리는 작업이 엿의 탄력을 만들어줘요. 이걸 안 하면, 엿이 이가 붙어요.”

섬에서 수확한 단호박으로 만든 수제 엿, 굳어가는 과정

엿을 자르는 손끝,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엿이 식으면 일정한 길이로 잘라 종이에 싸야 한다. 그는 기계 커팅기를 쓰지 않는다. “엿은 누가 먹는지 생각하면서 잘라야 해요. 너무 크면 불편하고, 너무 작으면 허전하죠.” 그래서 그는 손님 얼굴을 떠올리며, 크기도 미세하게 다르게 자른다.

그는 종이 대신 한지 포장을 고집한다. 겉은 얇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고, 엿의 수분을 조절해 준다.
“한지는 숨 쉬는 포장이에요. 엿도 숨 쉬게 해야 해요.” 그리고 그는 한지에 엿을 싸며, 작은 글귀를 적는다.
“바다처럼 천천히, 입안에서 녹으세요.” 그의 엿은 식당이나 마트에 납품하지 않는다.
오직 섬을 찾아온 손님에게, 혹은 우편으로 주문한 이들에게만 간다. 그는 엿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나눈 기억을 포장해 보낸다”고 말한다. 그래서 울릉도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이 있을 때, 그의 엿을 선물한다. 엿 한 조각에 담긴 정성과 시간이, 말보다 깊은 인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호박엿은 섬의 일기장 – 전통을 이어가는 손의 기록

 그는 해마다 엿 만드는 시기를 달리한다. 호박이 익는 시기, 날씨의 습도, 엿기름의 발효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엿을 대량 생산하지 않는다. “엿은 해마다 맛이 달라요. 그 해의 섬 기후가 고스란히 담기거든요.”

그는 매해 만든 엿의 상태, 온도, 재료 비율, 바닷바람의 세기까지 작은 노트에 기록한다. 이 노트는 엿의 레시피이자, 울릉도의 달력을 담은 맛의 일기장이다. 그는 그것을 ‘엿의 족보’라고 부른다. 요즘은 젊은 부부가 그의 작업을 도우며 기술을 배우고 있다. 그는 손기술보다 엿을 대하는 마음을 먼저 전하려 한다. “사람이 급하면 엿이 달아나요. 엿은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오늘도 울릉도의 파도 소리가 부엌 안까지 들어온다. 가마솥 위에서 천천히 졸아가는 황금빛 엿은 섬의 시간, 손의 인내, 그리고 바다의 숨결이 눌러붙은 단맛이다. 그 한 조각엔 기계가 만들 수 없는 기억과 정성이 달콤하게 녹아 있다.

 

느린 단맛, 섬의 리듬을 닮은 음식

그는 종종 엿을 만드는 일을 두고 “사람의 리듬을 되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걸 빠르게 원하지만, 엿은 빠르다고 완성되지 않는다.그는 엿을 만들면서 시계를 보지 않는다. “시간을 쫓기 시작하면 엿은 등을 돌려요. 냄새랑 온기, 흐름을 먼저 느껴야 하죠.” 이 말처럼 그의 작업실에는 타이머도 기계 저울도 없다. 대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파도 소리, 나무 냄새, 호박의 색감, 끓는 소리가 모든 기준이 된다. 그는 울릉도라는 공간이 엿을 만들게 했다고 말한다. “이 섬엔 빠를 수 있는 게 없어요. 배도 늦고, 날씨도 멋대로죠. 그러니까 뭐든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엿도 섬의 시간에 맞춰 졸이고 굳혀야 진짜 맛이 난다고 말한다. 이 느린 단맛은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에겐 낯설지만, 한 번 익숙해지면 입안에 오래 머물고 마음까지 부드럽게 만든다. 그는 엿을 팔기보다, 기억을 만든다고 여긴다. 그래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반드시 한 조각을 먼저 맛보게 한다. 입에 넣고 씹는 동안에는 조용히 기다린다. “단맛은 혀보다 속이 먼저 알아요.” 그리고 손님이 미소를 지을 때, 그제야 “그 엿은 오늘 잘된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의 엿은 그렇게 완성된다.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씹으며 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한 조각. 그것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울릉도라는 땅과 바람, 손끝의 시간으로 천천히 눌러붙은 섬의 풍경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