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은 사과의 고장이다. 일교차가 큰 기후, 맑은 공기,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 덕분에 이곳의 사과는 당도와 산도가 조화롭기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한 장인은 매년 가을, 직접 기른 사과를 손질해 천천히 초절임으로 만든다.
그는 사과를 얇게 썰어 설탕과 천연 식초, 바람과 온기로 절인다. 그 과정엔 인공적인 가열이나 보존제, 화학적인 첨가물이 없다. 오직 시간과 손끝, 발효의 감각만 있다.
“단맛은 하루 만에 나오지만, 신맛은 한 달을 기다려야 나와요. 난 그 신맛이 더 좋아요.”
그의 사과 초절임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청송의 계절과 손의 철학이 함께 담긴 자연 발효의 기록물이다.
이 글은 청송 사과의 신선함을 시간으로 익혀낸, 한 장인의 정직한 단맛과 기다림의 기술을 따라간 이야기다.
단맛보다 먼저 신맛을 읽는 사람 – 재료와의 첫 대화
사과 초절임의 시작은 사과를 고르는 일이다. 그는 시장에서 사 오지 않는다. 매년 직접 키운 사과나, 아는 농부로부터 받은 제철 사과만 쓴다. “초절임은 맛이 아니라 성격이에요. 어떤 사과는 설탕을 많이 먹고, 어떤 사과는 금방 시어요.”
청송의 사과는 껍질이 단단하고 과육이 촘촘해 절임에 특히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당도만 높은 사과는 쓰지 않는다. “달기만 한 사과는 설탕이랑 싸워요. 신맛이 살아 있어야 균형이 잡혀요.”
그래서 그는 사과를 썰기 전 먼저 하나씩 맛본다. 그리고 수분, 산도, 조직감을 손으로 만져 확인한다.
그는 사과를 껍질째 얇게 썬다. 껍질에 있는 미세한 향과 색감이 초절임의 풍미와 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씨앗은 모두 제거하고, 얇은 조각들은 사기그릇이나 유리용기에 차곡차곡 눌러 담는다.
그 위에 직접 만든 천연 식초(사과식초 또는 오미자식초)를 붓고, 설탕을 뿌려 숙성의 준비를 마친다.
이때 식초와 설탕의 비율은 사과의 당도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그는 레시피를 외우지 않고, 재료를 보고 손으로 가늠한다.
“기계는 모르는 맛이 있어요. 손이 먼저 알죠. 오늘은 덜 달고 더 시게, 그런 감이 있어야 돼요.”
절이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 발효의 시간
초절임은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는다. 그는 보통 사과 초절임을 21일 이상 숙성시킨다. 처음 3일은 그릇에 거품이 올라오고, 안의 공기가 팽창하면서 뚜껑이 들썩인다. 이때가 자연 발효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산소가 들어가면 맛이 날아가요. 그래서 처음 3일은 살짝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죠.”
1주일이 지나면, 사과 조각은 설탕에 의해 살짝 투명해지기 시작하고, 식초의 향이 과육 속으로 스며든다. 이때부터는 **‘덜 단맛, 더 신맛’**이 살아난다. 그는 그 시점을 ‘사과가 사람 말을 듣기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2주차가 되면 안의 액체가 더 맑아지고, 사과의 결이 부드러워진다. 그는 매일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고, 액을 한 숟갈 떠서 맛본다.
“오늘은 혀끝에서 튕기고, 내일은 목 뒤에 신맛이 남고. 그게 재미예요.”
그의 말처럼, 초절임은 맛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매일 달라지는 신맛을 기록하는 일이다.
숙성이 끝나면, 액체는 따로 병에 담아 드레싱이나 음료로 쓰고, 조각은 냉장고에 보관해 반찬, 토핑, 간식으로 활용한다.
그는 한 병의 초절임을 ‘사과 한 개의 일기장’이라고 부른다.
초절임은 반찬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배려
그는 초절임을 많이 만들지 않는다. 하루에 3~4병이 고작이다. 판매보다 나눔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과 절임은 성격이 달라요. 어떤 건 부드럽고, 어떤 건 사각해요. 입맛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누구 줄지 떠올리면서 담아요.”
그는 병 하나에 라벨 대신 손글씨 쪽지를 붙인다. “속이 차가울 때 드세요.” “고기랑 같이 드시면 좋아요.”
그 쪽지는 음식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를 먼저 살피는 작은 편지다.
그래서 그의 초절임은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절인 음식’이라는 평을 듣는다.
이 초절임은 손님상에 반찬으로도 오르지만, 청년 예술가들의 작업실, 요양병원, 사찰 공양간에도 전해진다.
그는 “약은 아니지만, 속을 풀어주는 음식이에요. 너무 맛있을 필요는 없고, 몸에 덜 부담되면 돼요.”라고 말한다.
그 철학은 곧 음식의 겸손함과 사람을 향한 배려로 이어진다.
그는 초절임을 줄 때, 반드시 먹는 시간대를 물어본다. “아침이면 묽게, 저녁이면 진하게.”
그의 초절임은 입맛보다 사람의 리듬을 먼저 읽는 음식이다.
시간이 남긴 단맛 – 발효를 전하는 삶의 방식
그는 초절임을 비즈니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발효는 남는 게 없어요. 근데 사람은 남죠.”
그 말처럼, 그는 지역의 발효식 체험교실을 운영하며 계절마다 다양한 절임을 함께 만든다. 봄엔 머위장아찌, 여름엔 오이초절임, 가을엔 사과, 겨울엔 무와 연근이다.
그는 초절임을 요리보다 삶의 리듬이라고 여긴다. “절인다는 건 기다리는 연습이에요. 요즘 사람들 너무 급하잖아요.”
그는 학생들에게 설탕을 재고 식초를 붓게 하는 대신, “먼저 사과를 한 입 먹어보라”고 한다.
“그걸 먹고, 네가 지금 시고 싶은지 달고 싶은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의 제자 중 몇은 카페에서 이 사과초절임을 응용한 메뉴를 만들기도 했다. 사과절임 에이드, 사과절임 샐러드, 사과절임 샌드위치 등.
그는 그 결과보다 “이걸 만든 손이 누구를 떠올렸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도 청송의 조용한 부엌 한쪽, 사기그릇 안에서 사과 조각들이 조용히 절여지고 있다.
그 속엔 사과의 결, 사람의 손,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시간이 새콤달콤하게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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