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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무주 머루 와인 장인, 산골 포도에 숨어 있는 깊은 단맛

 전라북도 무주는 깊고 고요한 산골이다. 가파른 산길과 맑은 계곡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자라는 야생 머루는 무주만의 독특한 자연이 만든 선물이다. 이곳에서는 머루를 단순한 과일이 아닌 자연을 병에 담는 방식으로 숙성시키는 장인이 있다. 그는 20년 넘게 머루로 와인을 만들며 무주 산골의 기운을 병 속에 빚어왔다. “머루는 재촉하면 입을 다물어요. 천천히 기다리면 자기 향을 내죠.” 그는 와인을 빠르게 만들지 않는다. 매해 달라지는 날씨, 익는 속도, 그리고 머루의 얼굴을 그대로 기억해내는 이 사람은, 자연이 먼저 말하고, 사람은 그 말에 답하는 방식으로 술을 빚는다. 이 글은 그 장인의 손끝에서 발효된 무주의 시간과 머루의 향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머루는 손으로 따야 제 맛이 난다 – 수확의 감각부터 시작되는 와인

 머루 수확은 보통 가을 초입, 9월 말부터 시작된다. 무주의 머루는 재배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산비탈에 자생하는 야생 머루다. 그는 매해 8월부터 산에 올라 머루의 상태를 본다. “잎이 아직 푸르면 당이 덜 찬 거예요. 껍질이 보랏빛으로 바뀌고, 줄기에서 진이 올라오면 수확할 때죠.”
머루는 포도보다 훨씬 껍질이 단단하고, 당도가 낮으며, 알이 작다. 그만큼 한 병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양의 머루가 필요하고, 더 많은 손이 필요하다. 그는 머루 수확도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한다. “덩굴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손으로 휘감아 따야 해요. 기계는 그걸 못 봐요.”

수확한 머루는 줄기째 바구니에 담아, 흙과 먼지를 털고 하나하나 손으로 골라낸다. 벌레 먹은 것, 당도가 떨어지는 것, 익지 않은 것들은 제거한다. 머루 와인은 특히 초기 과육 상태가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는 이 단계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다. “와인은 사실 이때 80%가 결정돼요.”

그는 머루를 하루 안에 다 처리하지 않는다. 수확 후 반나절 이상을 그늘에서 쉬게 하여 당이 좀 더 농축되도록 만든다. 이 과정을 그는 ‘머루의 숨 고르기’라 부른다. “사람도 너무 바쁘면 제맛이 안 나잖아요. 과일도 마찬가지예요.” 그 말처럼 그의 와인은 단순히 과일을 발효시킨 게 아니라, 자연의 리듬을 이해하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발효는 기술이 아니라 기다림 – 산속 셀러에서 숙성되는 시간

 머루는 일반 포도와 달리 산도가 높고 당도가 낮아 발효가 까다롭다. 그는 수확한 머루를 껍질째 으깨서 항아리에 담는다. “껍질이 얇은 포도는 즙만 쓰지만, 머루는 껍질에서 향이 나요. 떫은맛을 억제하면서 향을 살리는 게 핵심이에요.”
1차 발효는 10도 내외의 셀러에서 10~14일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거품이 올라오고, 알코올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그는 하루 두 번씩 뚜껑을 열어 향을 맡고, 거품의 상태를 확인한다. “소리가 작아지면, 발효가 끝나간다는 신호예요. 그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해요.”

1차 발효가 끝난 와인은 다시 걸러지고, 깨끗한 유리병에 담겨 2차 숙성에 들어간다. 이 숙성 기간은 최소 6개월, 길게는 2년까지 간다. 그는 “단맛이 무거우면 오래 숙성시키고, 산도가 살아 있으면 짧게 가져가요. 매년 달라요.”라고 말한다. 해마다 다른 머루의 성격에 따라 숙성 방식도 달라진다.

그는 발효를 인위적으로 조절하지 않는다. 인공 효모나 설탕을 쓰지 않고, 머루 껍질에 붙은 천연 미생물의 힘만으로 자연 발효를 유도한다. 그래서 발효가 느리기도 하고, 실패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자연이 실패라고 말하면 그냥 그 해는 그런 거예요. 억지로 맛을 만들면 술이 아니라 음료가 되죠.”

그의 와인은 깊은 보랏빛을 띠고, 혀끝에 묵직한 떫은맛과 뒷맛의 신맛이 길게 남는다. 단맛보다 향과 감촉이 주는 긴 여운이 특징이다. 그는 이 맛을 ‘무주의 속도’라고 부른다. “금방 달아나지 않는, 오래 남는 산골의 향기요.”

잎 사이로 빛을 머금은 야생 머루 열매, 껍질에 윤기가 도는 모습

와인은 혼자 마시는 게 아니다 – 손님과 나누는 한 병의 철학

 그의 와인은 온라인에 없다. 유통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작은 와인셀러 겸 작업장 한 켠에서 매주 방문한 손님에게만 판매한다. “한 병에 들어간 시간을 설명하고 싶어요. 그냥 팔기엔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방문객에게는 와인만이 아니라, 머루 수확부터 발효까지의 과정을 직접 보여주고 맛보게 한다. 그는 와인을 따라주며 말한다. “이건 작년 가뭄이 심했던 해 머루예요. 그래서 산미가 강하죠. 근데 냉면이랑 잘 어울려요.”

그는 와인을 음식과 함께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혼자 마시면 그냥 술이에요. 같이 먹어야 기억이 돼요.” 그래서 그는 와인 옆에 항상 제철 반찬, 나물무침, 도토리묵 같은 간단한 산골 음식을 함께 낸다. “머루는 서양 술 같지만, 입은 여전히 한국이거든요.” 이 조합은 외국인 방문객에게도 인기가 많다.

그는 와인을 테이스팅하며, 와인의 이름 대신 계절과 땅의 이름을 붙인다. 예: ‘초가을 안개’, ‘무풍리 저녁’, ‘사향 머루 늦빛’ 등. 이 이름은 와인의 성격뿐 아니라, 그 해 무주에서 있었던 기후와 그의 감정까지 담아낸 기록이다.

그의 와인은 단순히 마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병을 둘러싼 대화, 기억, 감정까지 함께 숙성된 공감의 술이다. 그래서 그의 와인병엔 라벨보다 더 오래 남는 여운이 있다.

 

머루 한 알에 담긴 땅의 시간 – 다음 세대를 위한 발효의 손

 그는 이제 칠순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머루밭과 산을 오르내린다. “머루는 나보다 늙었어요. 백 년 넘은 줄기들도 있거든요.” 그는 이 오래된 머루 덩굴들이 무주의 산세와 기후를 기억하는 생명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 머루들을 함부로 베지 않고, 가장 햇빛이 잘 드는 방향만 다듬는다.

그는 머루 와인을 상업화하거나 대량 생산할 생각이 없다. “와인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예요. 자연한테 공손한 태도.” 최근 몇몇 청년들이 그에게 발효를 배우고자 찾아왔다. 그는 와인 만드는 법보다 먼저, 머루밭을 하루종일 돌게 한다. “먼저 땅의 냄새부터 익히라고 하죠. 땅을 안 알아보면 머루도 몰라요.”

그는 ‘머루학교’라는 작은 워크숍을 계절마다 운영하고 있다. 봄에는 머루 순을 따고, 여름에는 그늘을 정리하며, 가을에는 수확을, 겨울엔 와인 테이스팅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은 하나의 과일이 술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기다림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오늘도 무주 산골의 한 작업실에선, 한 병의 와인이 숙성되고 있다. 그 병 속에는 단순한 과즙이 아니라, 산의 기운, 햇살, 흙냄새, 사람의 손끝, 그리고 한 장인이 매해 기록해 온 자연의 시간이 조용히 발효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