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태백은 한때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다. 검은 연기와 먼지가 도시를 뒤덮던 시절, 이곳은 수많은 광부들의 땀과 노동이 모인 산업의 심장부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광산이 폐광되었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며 여전히 불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 그는 광산에서 쓰이던 석탄화덕을 개조해 전통 방식으로 빵을 굽는 장인이다. “나는 화덕 안에 광부들의 시간을 넣어 구워요. 이건 단순한 빵이 아니라, 불의 기억이에요.” 태백이라는 땅에 남은 마지막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그는 매일 아침 새벽부터 화덕에 불을 지핀다. 이 글은 바로 그 불 위에서 구워낸 한 조각의 빵에 담긴 태백의 시간과 장인의 손맛을 기록한 이야기다.
태백 석탄은 에너지가 아니라 삶이었다 – 화덕 속 불꽃의 의미
이 장인은 원래 광부였다. 1980년대 태백 탄광에서 일하던 그는 폐광 이후 삶의 전환점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석탄은 그의 몸과 기억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 인생에서 불은 그냥 열이 아니에요. 그건 겨울을 이긴 에너지였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동력이었죠.” 그는 그 불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폐탄광 인근에 남아 있던 석탄용 화덕을 수리해 직접 화덕을 만들었다. 처음엔 연탄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광산에서 나오는 무연탄과 목탄을 혼합해 ‘저온 장시간 복사열’ 방식으로 화덕의 온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기름이나 전기로 굽는 빵은 불의 숨결이 없어요. 빵은 불을 알아야 제맛이 나요.”
화덕에 불을 붙이면 약 1시간 뒤 복사열이 골고루 퍼진다. 그는 불을 직접 만지지 않지만, 연기와 화덕 벽의 색으로 온도를 가늠한다. “화덕은 거짓말을 안 해요. 오늘 빵이 잘 나올지 아닐지, 아침 불빛 보면 알아요.” 그의 하루는 그렇게 불과 대화하는 일로 시작된다.
그에게 석탄은 여전히 에너지원이자 추억이다. “예전에는 광산에서 캐던 게 석탄이었지만, 지금은 그걸로 사람에게 기억을 굽는 거예요.” 화덕에서 시작된 이 빵은 태백이라는 땅의 산업과 감성, 그리고 사라진 것에 대한 예의를 품고 있는 불 위의 음식이다.
반죽도 숙성도 빠르지 않다 – 빵을 만드는 손의 감각
그가 만드는 화덕빵은 밀가루, 천일염, 정제되지 않은 사탕수수 당밀, 태백 계곡물만으로 반죽된다. 이 단순한 재료들은 시간과 온도에 따라 전혀 다른 빵의 표정을 만든다. “빵은 재료보다 기다림이에요. 사람 마음도 그렇고.” 반죽은 최소 18시간 이상 저온 숙성시킨다.
기계 반죽기를 쓰지 않는다. 모든 재료는 손으로 섞고, 손으로 치댄다. “반죽을 만져보면 오늘 공기 상태가 보여요. 습하면 질고, 마르면 잘 찢어져요.” 그는 손가락 감각으로 수분과 온도를 조절하며, 매일 반죽에 ‘오늘의 기운’을 담아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반죽은 마치 그날의 공기와 리듬을 기록한 음식 노트처럼 존재한다.
반죽은 발효 이후 모양을 잡는다. 동글고 평평한 형태의 이 빵은 화덕의 복사열로 골고루 익는다. 그는 빵을 화덕 벽 가까이 붙이지 않는다. “불에 너무 가까우면 타고, 멀면 안 익어요. 중간 지점에서 시간을 기다려야 해요.” 그렇게 구워낸 빵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며, 연기와 숯향이 스며든 특별한 풍미를 갖는다.
그는 이 빵을 “고원의 숨결”이라고 부른다. 고도가 높고, 공기가 맑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태백의 속도를 빵에 그대로 담아낸 셈이다. 그래서 그의 빵은 단순한 구움식이 아니라, 하루와 계절을 함께 구운 공예품 같은 존재다.
화덕빵은 기술이 아니라 기억이다 – 손님과 함께 빚는 이야기
그의 빵은 택배나 온라인 판매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화덕빵은 갓 구웠을 때가 제일 좋아요. 택배로 보내면 그 향이 죽어요.” 대신 그는 작은 매장에서 하루 50개 내외의 빵만 구워 판다. 가게엔 커다란 테이블과 오래된 석탄 삽이 장식처럼 놓여 있다.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기억 박물관이다.
손님 대부분은 태백 출신이거나, 광산과 관련된 가족의 추억을 갖고 있다. 어떤 이는 광부였던 아버지를 기억하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먹었던 도시락 속 검은 빵 냄새를 떠올리며 그를 찾아온다. 그는 그런 손님들에게 빵을 건네며 말한다. “이건 어릴 적 당신 집 아궁이에서 나던 그 냄새일 거예요.”
그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빵을 굽는다. 어떤 날은 화덕 불이 너무 세서 빵을 태우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반죽이 예정보다 늦게 부풀어 개점이 늦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손님들은 기다린다. 그 시간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만의 ‘불의 기억’을 공유하는 시간이 된다.
그는 말한다. “빵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에요. 먹을 사람의 기억까지 같이 빚는 거죠.” 이 말처럼, 그의 화덕빵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공감과 위로, 그리고 기억의 전달 도구가 되고 있다.
불씨를 잇는다는 것 – 고장에서 이어지는 장인의 내일
그는 태백의 마지막 광부 중 하나로 불린다. 빵을 만들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하루 한 번은 광산 쪽 산길을 걷는다. “그곳 냄새를 안 맡으면 빵 반죽이 잘 안 돼요. 몸이 아직 그 불을 기억하거든요.” 그의 하루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여전히 석탄의 기억을 살리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그는 지역 청년들과 함께 ‘화덕학교’를 시작했다. 빵을 굽는 기술이 아니라, 불의 온도를 읽는 감각, 반죽의 호흡을 느끼는 시간, 기다림의 리듬을 나누는 체험형 프로그램이다. 매주 1~2명의 청년이 그와 함께 화덕을 지피고, 반죽을 만지고, 굽는 과정을 배우며 '빵보다 더 큰 것'을 얻어간다.
그의 아들은 지금은 직장인이지만, 언젠가 아버지의 화덕을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 그도 화덕 옆에 앉아 아버지의 구움 방식, 연기의 흐름, 반죽의 색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기술은 못 배워도, 마음은 기억할 수 있잖아요.” 아들은 그렇게 빵보다 뜨거운 장인의 철학을 물려받고 있다.
오늘도 태백의 골목 한쪽, 조용한 화덕 안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빵 하나가 익어간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불의 시간, 땀의 기억, 그리고 사라지지 않게 이어온 고원의 온도를 품은, 작지만 깊은 위로의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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