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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거창 약초 농부, 들풀에서 건져 올린 건강의 지혜

 경상남도 거창은 깊은 산과 맑은 물, 깨끗한 공기로 둘러싸인 고장이다. 이곳에서는 오랜 세월 자연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특히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직접 채취하고 가공해온 농부들이 여전히 그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중 한 농부는 30년 넘게 거창 야생 약초의 철학과 생태, 계절의 흐름을 몸으로 익혀온 장인이다. 그는 시장에 나오는 농축액이나 말린 가루보다, 들풀 하나의 ‘제때’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약초는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해요. 때를 놓치면 그냥 잡초죠.” 그에게 약초는 단순한 건강식품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주고받는 조용한 대화이자, 흙 위에서 배우는 생명의 질서다. 이 글은 바로 그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한 농부의 이야기다.

 

거창 약초는 봄에 피고, 가을에 말을 건다 – 채취의 철학

 그의 하루는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그는 계절마다 약초가 자라는 길을 알고 있고, 어떤 식물은 어느 시간대에 가장 향이 짙은지도 안다. “같은 쑥이라도 아침에 따면 약이 되고, 해 질 무렵에 따면 냄새만 나요.” 실제로 그는 약초마다 수확의 ‘적시’를 철저히 지킨다. 이 철학은 그의 약초가 더 향이 진하고, 효과가 뛰어나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무작정 캐지 않는다. 도라지, 삽주, 더덕, 하수오, 천궁 등은 뿌리의 굵기보다 결의 방향과 흙의 밀도를 본다. “힘으로 캐면 다쳐요. 식물도 사람처럼 상처 나면 효능이 줄어들어요.” 그래서 그는 약초를 캘 때 항상 호미 대신 손을 먼저 쓴다. 흙을 파헤치기보다 살살 흔들어 뿌리가 스스로 빠지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건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서식지 보전이다. 그는 절대 한 자리에서 약초를 모두 캐지 않는다. “한 군데서 다 캐면 다음 해엔 그 풀 다시 못 봐요.” 그는 자생지마다 몇 뿌리는 남기고, 번식 가능한 방향의 종자나 뿌리를 남긴다. 그래서 그는 ‘약초를 캐는 사람’이 아니라 ‘약초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가 키우는 약초는 일부 밭에서 재배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야산에서 자란다. 들판에서 자란 들깨잎, 계곡 옆에 난 곰취, 바위틈에 뿌리내린 삼백초 같은 식물들은 농약도, 비료도 필요 없다. 그 대신 그는 하늘을 보고, 물길을 보고, 바람의 방향을 읽는다. 약초를 키운다는 것은 자연의 흐름을 받아 적는 일에 가깝다.

 

말리지 않고 살려낸다 – 손끝에서 완성되는 약초의 생명력

 약초를 채취한 뒤 가장 중요한 과정은 건조다. 그는 일반적인 직사광선 건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잘 드는 그늘에서 서서히 수분을 빼는 방식을 택한다. “햇볕은 빠르지만, 식물의 향을 죽여요. 그늘은 느리지만, 뿌리까지 향을 남기죠.” 그는 잎과 줄기, 뿌리마다 건조 위치와 방법을 다르게 한다.

뿌리약초는 물에 담갔다 꺼내는 ‘침수 건조’, 잎은 두 겹 망 사이에 눕혀 바람에 말리는 ‘상풍 건조’, 줄기류는 대나무 줄에 걸어 그늘에 매다는 방식으로 말린다. 이 모든 과정은 기계가 아니라 손과 눈으로 이뤄진다. “약초는 기계가 알아듣는 언어가 없어요. 손이랑 눈이 먼저 말해야죠.”

건조 후에는 약초마다 다르게 손질한다. 어떤 약초는 결을 따라 얇게 썰고, 어떤 것은 뿌리 끝만 잘라내고 통째로 보관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는 ‘상처 없이 다듬기’를 최우선으로 한다. “약초는 살려서 다듬어야 해요. 죽은 것처럼 만들면 그냥 조미료가 돼요.”

그는 가공도 거의 하지 않는다. 분말, 추출액 등으로 대량 판매하는 대신, 그대로 삶거나 달여 먹는 전통 방식을 유지한다. 그는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효과를 빨리 보려고 하지만, 약초는 빨리 안 들어요. 천천히 몸에 스며야 진짜예요.” 그 말처럼, 그의 약초는 시간을 먹는 방식이다.

초여름 들풀 산자락에 피어난 보라색 도라지꽃 한 송이

약초는 몸이 아니라 마음도 낫게 해야 한다 – 나눔의 가치

 그는 거창 읍내 장날마다 약초 몇 다발을 들고 시장에 나간다. 간판도, 포장도 없이 좌판 하나 펴고 앉아 손님을 맞는다. “이건 위장에 좋아요.” “이건 허리에 찬 바람 내려요.” 그는 약효를 설명하기보다, 손님이 어디 아픈지를 먼저 묻는다. 그러면 손님은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속이 답답해요.” “잠이 잘 안 와요.”

그렇게 사람의 말 속에서 증상을 읽고, 거기에 맞는 풀을 권한다. 어떤 날은 돈을 받지 않고 약초 한 줌을 쥐여주기도 한다. “약초는 팔기도 하지만, 나누는 게 더 맞아요. 그게 원래 이 풀들의 방식이었거든요.” 그의 약초가 특별하다는 평은 결국, 식물의 효능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는 약초에 관해 글을 쓰거나 방송에 나가지 않는다. “말로 설명하면 다 잊어버려요. 몸이 기억하게 해야죠.” 그래서 그는 손님에게도 항상 “직접 삶아보고, 냄새 맡아보고, 먹고 자고 해보라”고 말한다. 약초는 그런 방식으로 몸에 스며든다.

이런 태도 덕분에 그는 ‘약초 장인’이란 별칭보다 ‘산사람’ 혹은 ‘풀아재’로 더 많이 불린다. 그도 웃으며 말한다. “풀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까, 내가 풀 같아졌나 봐요.” 그 말 속에는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길 바라는 농부의 정직한 바람이 담겨 있다.

 

약초는 물려주는 게 아니라 맡기는 것이다 – 다음 세대를 위한 자연의 기록

 그는 자식들에게 약초 농사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건 가르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한두 해 산에 오르내려야 이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어요.” 대신 그는 그동안 기록한 약초 달력, 자생지 지도, 채취 일지를 책으로 엮고 있다. “나중에 누가 필요할지 모르잖아요.”

최근에는 도시 청년들과 함께 계절별 약초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뿌리 캐기, 그늘 말리기, 약초 차 우리기 등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약초가 자라온 시간과 사람의 감각을 연결하는 실습 중심 수업이다. 그중 몇몇은 아예 거창에 정착해 약초를 배우고 있다. 그는 그들을 ‘제자’가 아닌 ‘동지’라 부른다.

그는 “약초는 누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풀은 그냥 나서, 제때 알려주고, 사라지는 거죠”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초가 팔리는 것보다, 누군가 풀을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을 더 기뻐한다.

오늘도 거창의 산자락 한 귀퉁이에서, 한 농부가 풀을 바라보고 있다. 흙을 헤집지 않고, 풀을 쓸어 넘기며, 조용히 자라는 것들을 기다린다. 그 속에는 약보다 깊은 자연의 질서, 손의 철학,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삶의 방식이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