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은 도자기의 고장이다. 조선시대부터 관요가 운영됐던 이곳에는 지금도 장인들의 가마가 불을 지피고 있다.
특히 이곳의 찻사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을 담은 기물이다.
균일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고, 반듯하지 않지만 편안한 선. 이는 기계로 찍어낸 완벽함과는 다른, 손의 감각과 기다림으로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다.
문경 찻사발 장인은 말한다. “찻사발은 비우는 그릇이에요. 차를 담지만, 마음은 담지 말아야 해요.”
그가 만드는 찻사발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불과 흙, 바람과 손, 침묵과 집중이 빚어낸 고려의 선(線)이다.
이 글은 찻사발 한 점에 깃든 장인의 철학과 손끝의 시간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찻사발은 흙에서 시작된다 – 몸을 만들 흙을 고르는 일
그가 사용하는 흙은 문경의 산에서 직접 채취한 백토와 점토다. 흙은 사기장의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흙을 쓰느냐에 따라 찻사발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흙이 너무 부드러우면 무너지고, 너무 거칠면 갈라져요. 찻사발은 중심을 잡을 줄 아는 흙이어야 해요.”
그는 사계절 동안 흙을 묵힌다. 봄에 채취한 흙을 겨울에 써야 그 안의 수분이 고루 빠지고, 결이 정돈된다는 것이다.
흙은 체에 걸러 불순물을 제거한 후, 물을 섞어 유연한 상태로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 흙의 밀도와 탄성이 확보된다. 그가 말하는 “좋은 흙”은 손에 닿았을 때 차갑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흙이다.
그는 이 흙을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은 침묵의 덩어리”라고 표현한다.
그 침묵 위에 물레가 놓인다. 그는 흙덩이를 물레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 전체로 눌러 중심을 잡는다.
“중심을 못 잡으면 찻사발은 돌아가다가 쓰러져요.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찻사발은 그렇게 중심을 잡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는 흙을 다루는 일은 기술보다 마음의 흐름을 읽는 일이라고 말한다.
속도가 빠르면 흙이 쪼개지고, 너무 늦으면 늘어진다. 손과 발의 호흡이 맞아야 비로소 곡선이 태어난다.
찻사발의 곡선은 손이 아닌 숨으로 만든다 – 물레 위의 명상
찻사발을 빚는 시간은 짧으면 3분, 길면 10분이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집중은 결코 짧지 않다.
그는 흙이 물레 위에서 돌아가는 동안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손끝과 눈, 흙의 무게에만 집중한다.
그는 이 순간을 “움직이는 명상”이라 부른다.
찻사발의 곡선은 정해진 형틀이 없다.
어떤 날은 입이 넓고, 어떤 날은 높이가 낮다.
그는 “흙이 오늘 어떤 모양으로 있고 싶은지를 손이 읽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즉, 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찻사발은 하나하나 모두 다르고, 그만큼 유일하다.
찻사발의 두께는 안팎의 균형이 중요하다. 너무 얇으면 쉽게 깨지고, 두꺼우면 차의 온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는 손가락을 안팎에서 맞대어 두께를 확인하고, 한숨의 길이만큼 손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인다.
그 정지의 순간이 찻사발의 선을 부드럽게 만든다.
물레에서 내려온 찻사발은 습기를 머금은 채 그늘에서 건조된다.
이때 흙의 표면이 바람과 온도를 받아들여 변화를 겪는다.
“건조는 굳히는 게 아니라 흙의 기운을 고르게 하는 과정이에요.”
불이 빚는 마지막 붓질 – 가마에서 태어나는 색과 결
건조된 찻사발은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들어간다.
그가 사용하는 가마는 전통 장작가마(요도)가마로, 불을 직접 지피고 온도를 조절해야 한다.
이 과정은 수십 시간이 걸린다.
그는 나무를 넣고 불을 때면서 말한다. “불은 다 보여줘요. 욕심도, 실수도.”
찻사발이 타는 온도는 약 1250도다.
불길이 고르게 돌아야 유약이 균일하게 녹고, 자연스러운 색이 입혀진다.
그는 가마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불꽃의 색을 본다.
“파랗게 타면 너무 차고, 붉으면 날카로워요. 딱 오렌지빛이 좋은 불이에요.”
찻사발은 가마 안에서 각기 다른 색과 질감을 입는다.
누런 빛, 잿빛, 군청빛, 자연재(자연재: 불과 재가 만들어낸 무늬)까지.
이 무늬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불이 남긴 흔적이다.
그는 “찻사발은 내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불이 마지막 붓질을 해주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가마에서 꺼낸 찻사발은 하나하나 표정이 다르다.
그는 그것들을 조용히 손에 올려보고, “이건 여름 차에 어울리겠다”, “이건 스님들께 드리자”고 말한다.
찻사발은 쓰임을 기다리는 그릇이자, 그 자체로 완성된 풍경이다.
찻사발을 전하는 마음 – 쓰는 사람까지 고려하는 철학
그는 찻사발을 만드는 것보다, 누가 어떻게 사용할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찻사발은 혼자 있으면 안 돼요. 차를 따라주는 손, 마시는 입, 바라보는 눈이 함께 있어야 돼요.”
그래서 그는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항상 ‘사용할 그릇’으로 찻사발을 만든다.
찻사발의 입구는 입술의 곡선을 따라가야 하고, 바닥은 손에 올렸을 때 안정감이 있어야 한다.
“컵처럼 반듯한 게 아니라, 살짝 기울어진 사발이 더 손에 붙어요.”
그는 이 작은 기울어짐을 위해 0.1mm의 손가락 압력을 조절한다.
그는 해마다 도예 체험도 운영한다. 어린이부터 외국인 관광객, 도예 전공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와서 흙을 만지고, 불을 보고, 차를 마신다.
그는 말한다. “흙을 만지면 자기 마음이 보여요. 찻사발은 그걸 고스란히 품어요.”
오늘도 문경의 조용한 산골, 장작가마의 불꽃이 살아난다.
그 안에서 흙과 불이 만나 하나의 찻사발을 빚고, 그 위에 장인의 숨결과 시간을 덧입히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기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고요한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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