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임실은 국내 치즈의 고향이라 불린다.
하지만 대량 생산되는 공장형 치즈와 달리,
이곳의 한 목장에서는 여전히 우유를 짜는 순간부터 치즈가 완성되기까지 전 과정이 손끝으로 이어지는 숙성의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곳에서 치즈를 만드는 장인은 말한다.
“우유를 짰다고 치즈가 되는 게 아니에요. 치즈는 우유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가 만든 치즈는 짜지도, 꾸덕하지도 않다. 입에 넣으면 조용히 퍼지는 우유의 숨결과 들판의 바람이 함께 담겨 있다.
이 글은 임실 들녘의 바람과 장인의 손길, 그리고 기다림으로 익어가는 수제 치즈의 여정을 따라간다.
임실 치즈는 우유에서 시작되지만, 소에서 완성된다 – 신선함의 기초
치즈는 결국 우유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우유가 어디서 왔고, 어떤 상태였는지가 맛을 결정짓는다.
임실에서 20년째 유가공을 해온 장인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직접 키운 젖소 30여 마리에서 매일 새벽 우유를 짠다.
사료보다 목초 중심 사육, 항생제 최소화, 계절 따라 소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환경 조성이 그의 기본이다.
“소도 감정이 있어요. 사람이 무뚝뚝하거나 날이 흐리면 우유도 탁해져요.
치즈는 그걸 고스란히 드러내죠.”
그가 말하는 가장 좋은 우유는 투명하고 단단한 단백질 구조를 갖춘 우유다.
우유가 뿌옇고 끈적이면 응고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그는 당일 오전에 짠 우유만 치즈로 사용하고, 하루만 지나도 버터나 요구르트로 돌린다.
“우유는 숨 쉬는 생물이에요. 숨이 살아있을 때 치즈를 시작해야 그 에너지가 안에 머물죠.”
응고는 유산균과 렌넷을 넣고 30도 이하의 저온에서 서서히 이뤄진다.
그는 이 과정을 ‘우유의 결정’이라 부른다.
아직은 하얗고 물컹한 이 커드(curd)는 마치 어린 치즈의 씨앗처럼,
앞으로 익을 풍미와 식감, 향의 잠재력을 모두 머금은 상태다.
자르지 않고 나눈다 – 응고 후 치즈의 첫 숨
응고된 커드는 물과 같은 유청(whey) 속에서 고요히 가라앉는다.
일반적으로는 커드를 균일하게 자르기 위해 커터블레이드를 사용하지만 그는 손과 나무주걱만으로 커드를 부순다.
“칼로 자르면 단단하지만 부서지고, 손으로 나누면 결이 살아 있어요.
그 결이 나중에 치즈를 입안에서 천천히 풀어지게 하죠.” 유청은 천천히 제거되고, 남은 커드는 면포로 감싸 자연 배수를 유도한다. 이때 무게를 이용해 서서히 눌러 물기를 빼는 것이 포인트다.
그는 “치즈는 물이 빠질수록 맛이 응축된다”고 말하며 모든 압착을 손과 무게로 조절한다.
기계 압력은 빠르지만 맛의 결을 깨뜨리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소금물 간수도 수제다. 하루에 두 번씩 교체하며, 치즈를 소금물에 담갔다 꺼내기를 반복한다. “치즈의 겉은 단단해져야 숙성 중 외부 곰팡이를 막고 안은 부드러워야 먹을 때 혀에 착 붙어요.” 이 간수의 농도와 시간은 치즈마다 다르며, 장인의 노트에는 치즈마다의 간 시간과 온도, 습도 기록이 차곡히 쌓여 있다.
숙성은 치즈가 스스로 완성되는 과정 – 기다림과 관리
그의 숙성실은 콘크리트 대신 흙 벽과 목재로 지은 공간이다.
실내 온도는 사계절 11도를 유지하고, 습도는 치즈 종류에 따라 달리 맞춘다.
곰팡이치즈의 경우 습도를 높이고, 단단한 숙성 치즈는 공기를 더 많이 돌게 한다.
“숙성은 가만히 놔두는 게 아니에요. 치즈가 어느 방향으로 익어갈지 매일 대화하면서 조절해야 하죠.”
치즈의 표면에 하얗게 피어나는 곰팡이(이것을 화이트 몰드라고 한다.)는 그 자체로 풍미의 바탕이 된다.
하지만 곰팡이가 과하면 암모니아 냄새가 돌기 때문에 그는 매일 수건과 솔로 치즈 표면을 닦아주고, 치즈를 180도씩 돌린다.
이 과정을 수십 일, 길게는 90일 이상 반복한다. 그는 “치즈가 맛있어지는 순간은 따로 없고, 그저 매일 조금씩 변하는 걸 보고 느끼는 과정 자체가 맛”이라 말한다. 그에게 숙성은 ‘완성’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다.
치즈는 음식이 아니라 대화다 – 사람과 연결되는 맛
그가 치즈를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누가, 언제, 어떤 기분으로 먹는가’다.
그래서 그는 대량 생산이나 유통을 하지 않고, 정기 구독과 동네 마켓, 지역 카페 납품만 고집한다.
“음식이 아니라 경험을 전하는 거니까, 무조건 많이 만드는 건 의미 없어요.”
그는 치즈와 함께 작은 엽서를 보낸다. 거기에는 이번 치즈를 만든 날의 날씨, 우유를 짤 때 들판에 핀 꽃, 숙성실의 향, 그리고 어울리는 음식과 와인에 대한 짧은 글이 적혀 있다.
“치즈 한 조각에도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누군가 곁에 두고 음미해줬으면 해요.”
이 치즈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혼밥을 하는 청년, 지방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작가, 채식하는 노년 부부도 있다.
그는 말한다. “모두 다르게 살지만, 같은 치즈를 통해 누군가의 식탁에서 잠시 이어지죠. 그게 치즈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오늘도 임실의 들판에는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따라 우유가 흐르고, 그 흐름 끝에 치즈가 숙성된다.
그 치즈 한 조각엔 자연의 흐름과 사람의 손, 그리고 기다림과 이야기가 조용히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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