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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장흥 전통 먹 장인, 검은 안료로 시간을 갈아낸다

전라남도 장흥 깊은 산속, 한 채의 낮은 기와집 안에는 늘 은은한 향이 감돈다.
향은 향나무나 백단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을 말리는 방 안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그윽한 나무 타는 냄새다.
이곳은 40년 넘게 수제 먹을 만들어온 유광식 장인의 작업장이다. 붓과 종이는 있어도 먹이 없으면 쓸 수 없다.
그는 말한다. “먹은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담는 재료예요. 글씨는 마음이 움직이는 길이니까요.” 그래서 그는 검은 색을 만드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그가 만든 먹은 단단하면서도 갈았을 때 부드럽고, 번지지 않으면서도 깊이 스며드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다.
지금도 그는 매일 새벽, 먹방에 불을 지피고, 솔기름을 태우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하루의 온도와 바람의 흐름을 기억하기 위해 먹이 놓일 방향까지 직접 손으로 정한다. 먹을 만든다는 일은 단지 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색 안에 시간을 담는 일이다.

 

먹, 검은 색은 불로 시작된다 – 그을음 채집의 예술

먹을 만드는 첫 번째 과정은 솔기름을 연소시켜 그 연기로 그을음을 모으는 일이다. 유 장인은 순수한 소나무 수지를 직접 끓여 만든 기름만 쓴다. 그 기름을 촘촘한 연소관에 떨어뜨려 천천히 태우고, 천장에 닿은 그을음을 벽면에 받아내 모은다. 이 과정은 최소 20일 이상 지속되며, 단 하루라도 비가 오면 그을음의 질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전적으로 날씨에 의존한다. 그는 연기가 벽에 닿는 순간의 흐름과 온도를 귀로 듣고, 코로 맡고, 손끝으로 눌러 그 질을 판단한다. 그을음을 받는 벽은 일반 벽돌이 아니라 손수 만든 흙벽이다. 이 흙은 장흥에서 채취한 황토와 왕겨를 섞어 만든 것으로, 그을음을 고르게 흡착하고 다시 잘 털어낼 수 있게 해준다. 벽은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 연기가 천천히 스치듯 흘러야 가장 순한 검은 색이 남는다고 한다. “타지 않은 검정이 제일 깊어요. 검정은 뜨거움보다 인내로 만들어지는 색이에요.” 그가 모은 그을음은 눈으로 봐도 부드럽고, 손끝으로 만지면 실크처럼 흘러내린다.

 

반죽은 손으로, 밀어내는 건 시간으로

그렇게 모은 미세한 그을음은 천일염과 생선풀, 식물성 젤라틴을 섞어 반죽을 만든다. 이 ‘잉크의 씨앗’은 한 번에 단단히 반죽하지 않는다. 그는 수분을 조금씩 더해가며 손으로 반죽을 밀고 접고를 수백 번 반복한다. 그 과정은 5시간 이상 걸리며, 손이 아니라 몸 전체가 기억해야 할 리듬을 가진다. 작업 중 그의 손은 검게 물들고 손바닥은 항상 차갑다. 왜냐하면 손의 온도가 높으면 먹이 물러지고 결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먹 반죽을 다룰 때 방 안의 온도를 17도 이하로 유지한다. 창문은 꼭 한 방향만 열고, 빛이 직사로 들어오지 않게 종이 커튼을 달아둔다. “검정은 섬세해요. 아주 작은 온도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요. 사람도 그렇잖아요. 말은 안 해도, 분위기 하나로 다 흔들리는.” 먹의 반죽을 다듬는 과정에서는 사포나 틀을 쓰지 않고, 손등으로 문지르고 손바닥으로 눌러 밀어낸다. 손등의 굴곡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곡선이, 나중에 갈 때 흐름을 만들어준다. 이때 생기는 미세한 기포를 제거하기 위해 그는 숯불 위에서 반죽 덩어리를 천천히 돌려가며 말린다. 겉은 살짝 굳고 속은 말랑할 때, 먹의 생명이 자란다.

완성된 먹의 표면을 손끝으로 다듬고 있는 장인의 손

바람과 먹의 대화 – 말리는 기술은 기다림의 미학

반죽이 완성되면 일정한 틀에 눌러 담아 굳히고, 그 뒤로 시작되는 건 먹의 진짜 시간, 말리는 과정이다. 유 장인은 볕이 들지 않는 방에 먹을 눕히고, 바람길을 따라 하루 네 번 방향을 바꿔준다. “바람은 눈에 안 보이지만, 먹은 그걸 그대로 기억해요. 바람이 얇게 들면 부드러운 먹이 되고, 바람이 갑자기 바뀌면 먹이 갈라져요.” 그의 먹방은 흙벽과 나무창으로 이루어진 전통방이다. 바닥에는 숯불을 피우고, 낮은 천장에는 먹을 걸어두는 선반이 달려 있다. 습도는 매일 직접 만든 감나무 습도계로 확인한다. 촉촉한 감나무 조각을 바람에 매달고, 하루의 굳기 변화를 통해 실내 습도를 가늠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날씨에 의존하지 않고, 날씨를 받아들이는 기술을 익혔다. 말리는 동안 그는 매일 먹을 손등으로 두드리고, 귀를 가까이 대어 ‘텅’ 하는 음색을 듣는다. 소리가 깊고 낮으면 잘 익은 것이고, 가볍고 똑똑하면 아직 덜 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먹은 말하지 않지만, 내가 매일 대답을 기다리는 친구예요.” 이 기다림은 단지 공정이 아니라 먹이라는 물질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무언의 대화다.

 

마무리된 먹, 말 없는 문장처럼 존재하다

먹이 다 말라 굳으면 그는 먹의 끝을 다듬고, 표면을 사포 없이 손가락 관절로 문지르며 마감한다. 그 표면은 반짝이지 않고, 마치 오래된 돌처럼 묵직한 질감을 품고 있다. 그는 옻칠이나 광택제를 사용하지 않고, 소나무 기름을 소량 묻힌 헝겊으로 3일에 걸쳐 천천히 문지른다. “먹이 반짝이면 종이에 물려요. 은은해야지. 말도 조용해야 잘 들리잖아요.” 완성된 먹은 나무 상자에 하나하나 눕혀 보관된다. 먹은 서 있으면 갈라지기 쉽고, 빛을 받으면 색이 바래기 때문이다. 그는 먹 하나에도 제작일과 사용 권장기간, 그리고 만든 날의 날씨를 손글씨로 기록한다. “이건 흐린 날 만든 먹이에요. 그래서 먹빛이 조금 부드러워요.” 그의 먹은 다 같은 검정이 아니다.
햇살, 바람, 손의 압력, 물의 비율, 그리고 마음의 온도까지, 모든 것이 반영된 하나의 시간의 형태다. 그는 말한다.“먹은 사라지지 않아요. 글씨가 사라져도, 그 글씨를 쓴 마음에 남아 있거든요.” 먹이 종이 위를 흐를 때, 그건 단지 색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감정이 지나가는 길이라는 걸그는 너무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