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외곽 산자락 아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고택 하나.바람이 쓸고 간 듯 조용한 이 집의 방 안은 놀랍게도 전기 한 줄 없이 따뜻하다. 바닥을 짚는 순간 느껴지는 온기, 그 온기 아래에는 불, 연기, 흙, 돌, 장인의 손이 숨어 있다. 이 집을 지은 이는 70대 중반의 온돌 장인 박무일. 그는 지난 45년간 전국의 한옥과 고택을 찾아다니며 전통 온돌을 복원하고 새로 짓는 일을 해왔다. “땅 아래서 피우는 불이, 사람의 마음을 데운다”는 말처럼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다.
강릉 온돌장인의 불은 눈에 띄지 않아야 온돌이다
온돌은 ‘불방’이라고도 불렸지만, 불이 보이면 실패한 온돌이라고 박무일 장인은 말한다. 진짜 온돌은 불이 지나간 자국만 남겨야 한다. 불기운은 방 안을 데우되, 연기도, 재도, 흔적도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는 온돌을 만들며 항상 굴뚝부터 설계한다. 온돌은 불길이 지나가는 길, 즉 ‘구들장 아래의 통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전체 열의 흐름이 달라진다. 불길이 너무 빠르면 금방 식고,
너무 느리면 방은 데워지지 않는다. 그는 집의 위치, 바람 방향, 겨울 습도까지 고려해 불길이 머무를 시간과 거리를 먼저 계산한다.
그 다음엔 구들장을 어떤 돌로 깔지 결정한다. “두꺼운 돌은 오래 가지만, 숨을 못 쉬고, 얇은 돌은 빨리 데우지만 금방 식어버리죠.
사람도 그렇잖아요.” 그의 온돌은 불이 곧장 굴뚝으로 빠지지 않게, Z자 혹은 S자 통로로 유도된다. 그 사이 연기는 자연스럽게 빠지고, 열기는 바닥에 머물며 방 안을 천천히 데운다. 그래서 그의 온돌은 불을 피운 지 4시간 뒤에 가장 따뜻해지고, 그 온기가 10시간 넘게 유지된다.
구들장을 고른다는 건, 몸의 감각을 선택하는 일
온돌의 핵심은 구들장이다. 박 장인은 구들장을 깔기 전, 반드시 신발을 벗고 바닥을 맨발로 밟아본다. 흙의 온도, 수분, 입자의 거칠기까지 발바닥이 가장 먼저 알아챈다고 그는 말한다. “발은 몸보다 먼저 알아요. 차가운 흙은 불을 싫어하고, 따뜻한 흙은 불을 품죠.”
그가 사용하는 구들장은 대부분 강릉, 평창 인근의 편마암이다. 이 돌은 열을 고르게 전도하고, 시간이 지나도 형태가 뒤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돌을 깔기 전, 흙을 한층 덮고 ‘연기길’(연도)을 조성한다. 이 길은 연기가 지나는 통로이자 열이 방 바닥에 퍼지는 관문이다. 그 위에 차돌과 깨진 기와 조각을 층층이 얹고, 그 위에 구들장을 정교하게 맞춘다. 이 과정은 단순한 쌓기가 아니라 하중과 균형을 고려한 구조 계산이다. 손으로 만져가며 빈틈 없이 맞추되, 딱 맞으면 안 된다. “돌은 딱 붙이면 숨을 못 쉬어요. 사람도 그렇고, 방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그는 1mm의 숨통을 남겨 돌이 숨을 쉬며 팽창과 수축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불길이 그린 선, 온돌은 기억을 담는 구조다
완성된 온돌에 처음 불을 넣는 순간 연기는 천천히 통로를 돌고 돌 아래는 서서히 온도를 올린다. 그때 박무일 장인은 바닥에 손을 얹는다. 그는 불의 흐름을 소리로 듣고, 열의 움직임을 손바닥의 눌림으로 읽는다. “돌이 눌리면 열이 꽉 찬 거고, 살짝 들리는 느낌이 나면 아직 모자란 거예요.” 이 설명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의 손은 오차 없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온돌은 불이 지나간 자리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머문 사람의 기억도 따뜻하게 남는다. 그래서 그의 온돌 작업은 단지 기술이 아닌 감정의 구조화다.
그는 항상 말한다. “좋은 방은 불의 시간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기억해요.” 한겨울에도 아랫목이 포근한 이유는 단순히 돌이 데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열이 사람이 앉았던 온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는 온돌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방 안에 30분 이상 조용히 머문다. 그건 방의 호흡을 듣는 시간이자 불이 만든 구조를 사람이 받아들이는 의식이다.
바닥을 만든다는 건, 삶의 무게를 받치는 일
전기 패널이나 온수 매트가 흔해진 요즘 전통 온돌은 사라지는 기술처럼 여겨지지만 박 장인은 여전히 온돌을 고집한다.
“전기는 따뜻하지만 깊지 않고 온돌은 천천히 데워지지만 오래 남죠.” 그는 온돌을 ‘몸이 눕는 바닥이자 마음이 앉는 자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온돌을 만들면서 늘 사람의 체형, 자는 자세, 가족 수까지 고려한다. 아이 둘이 있는 집이라면 아랫목을 넓게 만들어 주고, 노부부가 사는 집이라면 온기 유지 시간이 긴 구조로 설계한다. 그의 작업은 돌을 깔기 전에 사람을 떠올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누가 앉을지, 어떻게 누울지, 그 생각이 먼저예요. 온돌은 돌이 아니라 사람 중심 구조니까.” 그가 만든 온돌은 5년, 10년이 지나도 갈라지지 않고, 기계 없이도 조용히 온기를 머금는다. 그 온기 위에서 가족은 밥을 먹고, 아이들은 기어 다니며 자라고, 어른들은 담소를 나눈다. 그 모든 시간이 바닥 위에 쌓인다. 박무일 장인은 그걸 “땅 아래에서 피운 시간”이라 부른다.
불이 멈춘 자리에 남는 건 사람의 체온이다
박무일 장인의 온돌은 불이 꺼진 뒤에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낸다.사람이 앉았던 자리가 한참을 따뜻하게 남아 있고, 그 열기마저 빠져나간 뒤에도 방 안은 조용히 숨을 쉰다. 그는 불을 피운 시간보다, 불이 멈춘 뒤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진짜 온돌은 불이 없어도 따뜻한 방이에요. 그건 돌과 흙이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 머무는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가 만든 온돌 위에서 어머니가 밥을 짓고, 아이가 기어 다니며 자라고, 노인이 등을 대고 쉬는 순간들이 구들장 아래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래서 그는 온돌을 만들 때마다 단순히 바닥을 깔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 공간에서 흘러갈 수많은 하루를 상상하고, 그 시간의 무게를 견딜 바닥을 깔아두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열기, 소리 없는 움직임,그리고 무게 없는 기억이 쌓이는 그 자리를그는 여전히 두 손으로 만든다.온돌은 결국 집 안의 가장 낮은 곳에서가장 깊은 정을 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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