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의 끝자락, 벌교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좀처럼 찾지 않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바다가 밀려왔다 물러가는 갯벌이 넓게 펼쳐지고, 그 위로는 햇살이 낮게 깔려 천천히 염전의 표면을 말려간다. 대부분이 기계화된 현대 천일염 생산과 달리, 이 마을에서 3대째 갯벌 소금을 만드는 염장(鹽匠) 김창수 장인은 지금도 바닷물을 손으로 끌어오고, 바람을 읽고, 햇살을 기다리며 소금을 만든다. 그는 말한다. “소금은 바닷물이 아니라 시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김 장인이 소금을 만드는 모습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소금 한 줌에 스민 건 단순한 짠맛이 아니라 자연, 사람, 정성, 바람, 그리고 기억이다.
보성 전통 갯벌염-바닷물에서 시간을 걷어내는 일
갯벌 천일염은 일반적인 시화호나 대규모 제염시설에서 나오는 소금과는 출발부터 다르다. 김 장인이 만드는 소금은 기계펌프 없이,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을 갯벌 도랑을 통해 유입시켜 자연적으로 고인 염수를 원천으로 삼는다. “펌프로 끌어올린 물은 숨이 거칠어서 소금이 날카롭다”는 그의 말은 바다와 소금, 그리고 맛의 성질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썰물이 빠져나간 뒤, 햇살에 데워진 갯벌의 온도를 손으로 짚어보고, 소금물로 채울 염전의 시점을 판단한다. “흙이 숨 쉬는 온도, 바람이 비릿하게 바뀌는 시점”을 아는 건 수십 년간의 감각 덕분이다.
갯벌에 들어온 염수는 하루 이틀 동안 발효시키듯 가만히 두고, 흙이 불순물을 거르는 시간을 준다. 이 과정을 거친 물만이 ‘소금밭’이라 불리는 염전 위로 옮겨진다. 이때 사용하는 도구는 3대째 전해져 내려온 나무로 만든 물삽이다. 손으로 물을 퍼서 나무 홈통을 타고 옮기면, 갯벌 위 얕은 염전 안에서 햇빛과 바람이 소금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소금은 태양이 데우고 바람이 굳힌다. 사람은 그저 흐름을 도울 뿐”이라는 그의 말처럼, 소금은 사람의 기술이 아닌 자연의 흐름과 리듬 속에서 생성된다.
바람과 햇살로 빚는 소금, 손으로 가르는 결정
염전의 표면에 하얀 결정이 맺히는 순간은 마치 생명이 자라는 순간처럼 경이롭다. 김 장인은 소금이 맺히는 첫날에는 절대 걷어내지 않는다. “첫날 소금은 아직 마음이 안 잡혔어요. 한 번 더 기다려야 해요.” 이틀 혹은 사흘이 지나야 결정이 자리를 잡고, 수분이 빠지면서 결이 고와지기 시작한다. 그는 손끝으로 소금을 가른다. 갈퀴처럼 생긴 대나무 도구로 표면을 쓸면서 크기와 색을 보고, 이상적인 결정이 맺힌 지점만 수확한다.
가장 이상적인 전통 갯벌염은 결정이 작고 단단하며, 미세한 회색을 띤다. 회색은 갯벌이 걸러낸 미량의 광물질이 스며든 결과다. 이 회색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소금은 미세한 감칠맛과 풍부한 미네랄을 담고 있어 ‘짠맛’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실제로 그는 소금을 혀에 얹으며 설명한다. “이건 바다가 아니라 볕에서 나온 맛이에요.” 소금은 그 결이 고와야 음식의 맛도 부드럽고, 물에 녹는 속도도 일정하다고 그는 말한다.
수확한 소금은 일차로 대나무 선반 위에서 하루 동안 자연 탈수를 거친 뒤, 소금 항아리에 넣어 저장된다. 저장 항아리는 소금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숙성되며 맛이 안정된다. 김 장인은 이 저장 과정을 ‘소금을 쉬게 하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사람도 바로 일하면 탈 나듯, 소금도 바로 쓰면 제맛을 못 내요.”
짠맛이 아니라, 기억이 남는 소금
전통 염전에서 나온 소금은 단순히 ‘소금’이라는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다. 김 장인은 그걸 ‘기억의 맛’이라고 부른다. “그 해의 바람, 햇살, 첫 밀물의 흐름이 어떻게 흘렀는지가 소금에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해마다 같은 염전, 같은 방식으로 만든 소금이지만, 맛은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는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소금을 사용하는 요리사들은 ‘짠맛의 결이 다르다’고 말한다. 입 안에서 뻣뻣하게 퍼지지 않고, 천천히 퍼져서 재료의 풍미를 지켜주는 소금. 그것이 그가 만들고자 하는 소금의 본질이다.
그는 자신의 소금을 ‘덜 짠 소금’이 아니라 ‘조용한 소금’이라 말한다. “요즘 음식은 너무 자극적이에요. 소금이 다 드러나면, 재료가 말을 못 해요.” 그의 소금은 그래서 된장, 간장, 젓갈, 김치처럼 오래 두고 익히는 음식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갓 담근 김치보다는 묵은지와 잘 어울리고, 생선보다는 말린 생선이나 찜 음식과 더 조화를 이룬다. 자연과 함께 익힌 소금은 결국 기억을 오래 끌고 가는 맛을 만든다.
손으로 빚은 바다, 사라지는 기술을 지키다
갯벌염은 현재 전국에 몇 곳만이 전통 방식으로 남아 있다. 대부분 기계와 비닐하우스로 대체되었고, 젊은 세대는 염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김창수 장인도 아들의 권유로 한때 염전을 접을까 고민했지만, 그는 결국 소금밭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이 일은 내 손이 멈추면 사라져요. 흙도, 물도, 바람도 누가 기다려주지 않거든요.” 그는 지금도 매일 해가 뜨기 전 염전을 돌며 땅의 온도를 확인하고, 바람을 맞고, 갯벌의 질을 눈으로 살핀다.
그가 만든 소금은 많지 않다. 연간 1톤 남짓. 하지만 이 소금은 전국의 장인 된장, 장아찌, 간장 제조자들에게 미리 예약되어 나간다. 장인이 만든 장에 장인이 만든 소금을 넣는 셈이다. 그는 말한다. “장도 기다려야 되고, 소금도 기다려야 돼요. 둘 다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시간이 만든 거니까.” 소금을 빚는 일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말리고, 햇빛이 응고시키는 그 과정 속에서 사람은 그저 손끝으로 흐름을 도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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