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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을찾아서

안동 목판화 장인, 나무에 새긴 조용한 울림

안동 하회마을 옆 골목, 관광객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조용한 가옥 안. 그곳에는 나무 위에 정성스레 선을 새기고, 잉크를 입혀 종이 위로 문양을 옮기는 한 남자가 있다. 70대 목판화 장인 이재명 씨, 그는 반세기 넘게 한국 전통 목판화를 지켜온 사람이다. 전통 목판화는 단지 글씨를 찍거나 장식을 위한 그림이 아니다. 손으로 새긴 선 하나하나에 시간, 신념, 예술이 깃들고, 그 나무에 스민 정신이 종이 위로 전해진다. “나무는 말이 없어요. 대신 말이 남죠.” 이 장인은 그렇게 나무에 말을 새기고 있었다. 정적 속에 새겨지는 한 획은 보는 이의 마음에 더 오래 남는다.

 

안동 목판화, 칼끝으로 흐르는 선, 마음을 가르는 작업

목판화를 만드는 첫 단계는 나무를 고르는 일이다. 이 장인은 30년 넘게 안동 근처 산에서 직접 나무를 베어와 건조시킨다. 그는 말한다. “나무는 결이 일정해야 해요. 그리고 너무 부드러우면 날카로운 선이 안 나옵니다.” 선택된 나무는 최소 3년 이상 자연 건조시킨 뒤, 면을 다듬고, 그 위에 손수 디자인한 밑그림을 얹는다. 이때 밑그림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다. 손으로 그린 먹선, 붓으로 흐른 잉크, 그리고 손의 무게가 담긴 도안이기 때문에 단 한 장도 같은 것이 없다.

그다음 단계는 조각이다. 조각칼을 들고 숨을 고른 채 첫 선을 긋는 순간부터 그는 말을 멈춘다. 목판 위에 흐르는 칼끝은 거침없되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선은 마음이 흔들리면 다 보여요. 그래서 집중할 때는 내가 숨도 멈춰요.” 칼이 나무의 결을 따라 움직일 때면, 마치 물길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긴장감이 흐른다. 때로는 선이 휘기도 하지만, 그는 그 흐름까지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완벽한 선보다, 흔들렸지만 살아 있는 선이 더 오래 남아요.”

 

새기고 또 새기는 인내, 나무는 기억한다

목판화는 조각이 끝났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새겨진 면은 날카롭게 살아 있어야 하며, 칼 자국 사이로 잉크가 퍼지지 않도록 면을 다듬는 작업이 이어진다. 이재명 장인은 수십 년 된 조각칼을 사용해 면을 문질러 균일하게 만들고, 섬세한 부분은 돋보기를 끼고 다시 세밀하게 다듬는다. 그는 이 작업을 두고 ‘마음을 다듬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나무는 기억을 잘해요. 한 번 실수하면 그 자국이 영원히 남습니다.”

때로는 한 판을 완성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기도 한다. 특히 전통 한지에 찍어낼 문양일 경우, 인쇄의 번짐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나무 면의 평탄도까지 손으로 조절해야 한다. 그는 종이와 나무 사이에서 무언가 흐른다고 말한다. “그건 기술이 아니라 정성이에요. 칼로는 새길 수 없고, 손끝으로만 느껴지죠.” 한 번이라도 칼이 흔들리거나, 면을 덜 다듬으면 종이 위 선이 깨져버린다. 그래서 그는 나무와 눈을 마주하며 조용히 속삭인다. “잘 부탁한다.” 그 순간 나무는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도구가 된다.

목판 위에 조각칼로 정교한 선을 새기는 안동 목판화 장인의 집

잉크는 색이 아니라 감정이다

목판화에 사용되는 먹잉크는 보통 일반 인쇄용보다 더 진하고, 뻑뻑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장인은 전통 방식대로 먹을 직접 갈아 배합한 잉크를 사용한다. 먹의 농도와 점도는 그날의 습도와 온도에 따라 달라지며, 바르는 방식도 일정하지 않다. “습한 날은 잉크가 무거워요. 그래서 붓 대신 천으로 문지르죠.” 그가 말하는 잉크는 단순한 색이 아니다. 나무가 기억한 선을 종이로 옮기는 매개체이자, 장인의 감정이 녹아드는 순간이다.

종이 위로 처음 찍히는 순간, 잉크는 숨을 쉰다. 먹의 농도에 따라 선은 굵어지고, 번지기도 하며, 때로는 의도치 않게 새로운 텍스처를 만든다.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게 가장 좋은 선일 때가 많아요.” 그는 잉크가 말을 하고, 종이는 그 말을 기록한다고 말한다. 인쇄는 단 한 번만 이루어진다. 재찍기를 하지 않는다. 그 순간이 좋았든 실수였든, 나무와 종이 사이의 대화는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목판화는 복제가 아닌, 그 순간의 시간이다.

 

남는 건 작품이 아니라 나무의 말

이 장인의 작업실에는 수십 년 간 새긴 목판들이 조용히 쌓여 있다. 각각의 목판은 글씨, 문양, 인물, 풍경 등 모두 다르고, 같은 그림은 하나도 없다. 그 중에는 전통 부적, 불경, 한시 등을 담은 판도 있고, 세월호를 추모하는 그림도 있다. 그는 목판화를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말을 새긴 거예요.”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누군가는 읽고, 또 누군가는 잊을지라도, 나무는 그것을 기억한다고 믿는다.

이재명 장인은 작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모든 목판화는 교육 목적, 전시, 혹은 기부용으로만 사용된다. 그는 묻는다. “나무에 새긴 말을 팔 수 있을까요?” 대신 그는 마을 아이들에게 목판화를 가르치고, 고택 복원 사업에 참여해 잊힌 문양을 다시 새긴다. 나무가 말을 잃지 않게 하려는 그의 노력이, 지금도 안동의 조용한 집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잉크가 마르고, 종이가 바래도, 나무에 새긴 말은 더 깊이 남는다.

 

나무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재명 장인이 새긴 목판은 단지 장식용 예술이 아니다. 그 판 하나하나는 시간이 새겨져 있는 조용한 기록이고, 누군가의 말이자 시대의 문장이다. 우리가 화면 위에서 손가락으로 넘기는 수천 개의 이미지 속에서, 이 목판화 한 장은 더디게 말하지만 깊게 남는다. 그는 나무 위에 새기고, 종이 위에 옮기고, 다시 마음 속에 남긴다. 그렇게 전달된 목판화는 누구에게는 한 점의 미술이 되고, 누구에게는 전통의 시작이 된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새긴 선, 다시 찍을 수 없는 감정, 나무가 기억하는 결의 방향성.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 만든 결과물은 단순한 출력이 아니다. 그것은 장인의 손끝에서 시작된 이야기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기록이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위에 새겨진 선은 조용히 시간을 견디며 남는다. 그래서 이 글 역시 단지 장인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잊고 지내던 손의 온기와 느림의 가치, 그리고 하나의 선이 주는 깊이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나무는 오늘도 말없이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이 페이지를 닫은 후에도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