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예술은 서울,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전시관, 유명 작가의 이름, 도시 중심부의 갤러리 공간은 분명 예술의 거대한 무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자는 최근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장소를 다녀왔다.
경북 영양군의 한 폐교에서 시작된 ‘예술마을’ 프로젝트, 그리고 그 중심에 위치한 문화학교가 그곳이다.
이 문화학교는 1990년대까지 초등학교로 사용되다가 폐교된 후, 수년간 잡초와 먼지만이 쌓여 있는 장소였다.
그러던 중 한 예술가 집단이 이곳을 거점 삼아 ‘지방 예술 커뮤니티’를 만들겠다는 뜻을 품고 문화학교로 재탄생시켰다.
지금 이곳은 작가들이 장기간 체류하며 작품을 만들고, 전시도 열고, 지역 아이들과 예술 수업을 진행하는 살아 있는 예술 공간이 되었다.
기자는 이 예술공간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폐교라는 배경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영양으로 향했다.
폐교가 예술무대가 된 교실, 공간의 두 번째 인생
영양군의 산골 마을, 인구 100여 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폐교가 하나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일반적인 시골 학교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건물 외벽에 칠해진 벽화와 조형물들이 이곳이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교실의 창문은 전시 공간으로 개조되었고, 운동장은 야외 조각공원처럼 바뀌어 있었다.
기자는 입구에서부터 ‘예술로 재구성된 학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이 문화학교를 처음 만든 사람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설치미술 작가였다.
그는 도시의 예술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른다는 점에 회의감을 느꼈고, 보다 진정성 있는 창작 공간을 꿈꾸던 중 우연히 이 폐교를 알게 되었다.
처음 방문했을 땐 건물 곳곳이 낡고 위험할 정도였지만, 그는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 예술의 출발점"이라며 1년 넘게 직접 청소하고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교실 한 칸은 작가의 스튜디오로, 또 다른 칸은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방으로 바뀌었다.
그는 마을 어르신들과 협업해 ‘이야기를 담은 도예작품’을 만들고, 학생들과는 폐자재를 활용한 조형물 워크숍을 운영했다.
학교라는 구조를 해체하지 않고, 그 안에 ‘예술’이라는 기능을 더한 것이다.
지역과 예술이 연결되는 방식, ‘함께 만든다’는 감각
이 문화학교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작가 중심’이 아니라 ‘지역과의 공동 창작’이 주된 운영 방식이라는 점이다.
이곳에 입주하는 작가들은 최소 1개월 이상 영양에 머물면서 마을 주민과의 교류를 의무적으로 갖는다.
예를 들어, 농한기에는 주민들과 함께 ‘미술로 보는 우리 마을’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여름방학에는 청소년 예술캠프가 열린다.
단순히 전시만 하는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가는 예술을 지향하고 있었다.
기자는 우연히 한 워크숍에 참관하게 되었는데, 지역 할머니와 청년 작가가 함께 나무를 깎아 작은 조각을 만드는 수업이었다.
두 사람은 말수는 적었지만 손의 움직임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림은 잘 모르지만, 이거 하면서 내 젊은 시절 생각이 자꾸 나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예술이란 결국 표현의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를 통해 세대와 지역을 잇는 것, 그것이 이 문화학교의 진짜 성과였다.
교실에서 열리는 전시회, 아이들의 감성도 자란다
기자는 주말에 열리는 ‘작은 전시회’를 관람했다.
전시는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가 아닌, 초등학교 교실 그대로의 구조 안에서 열린다는 점이 무척 독특했다.
칠판이 전시 안내판 역할을 하고, 벽면은 그대로 전시 공간이 되며, 교실 뒤편 창문 앞엔 자연 채광을 활용한 설치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이 전시의 상당 부분이 지역 아이들과 함께 만든 공동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지역 초등학교 4~6학년 아이들이 예술가들과 함께 그린 ‘우리 마을의 미래 지도’,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동네 꽃 조형물’ 등은
기교보다는 상상력과 감정이 담겨 있어 더욱 인상 깊었다.
이런 전시는 아이들에게는 단순한 미술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공간을 돌아보게 만드는 특별한 경험이 되는 듯했다.
전시가 끝난 후, 한 학부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도 그렇고, 저희 가족 모두가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해져요.
예전엔 폐허 같던 학교가 이렇게 바뀌니까, 마을 분위기도 달라졌어요.”
단순한 재생 공간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바꾸는 공간이 된 것이다.
폐교의 경제적 가치? 진짜 가치는 ‘지속성’에 있다
많은 사람이 예술 공간은 운영이 어렵고, 수익성이 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화학교는 그 구조 자체를 지역과 연결하며 지속 가능한 모델로 변환하고 있었다.
작가 입주비는 최소 수준으로 낮추되, 일부 외부 워크숍은 참가비를 받는다.
또한 지역 관광 프로그램과 연계해 소규모 투어를 유치하고, 학교 매점은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간이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주말마다 열리는 ‘문화교실 체험 프로그램’은 영양군 외 지역에서 오는 관광객 수요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마을의 민박, 식당, 농산물 판매량도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예술은 돈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사례였다.
무엇보다 이곳은 외부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작가와 마을, 운영진이 수평적 관계로 협력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문화시설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폐교는 공동체 재생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술은 사람을 모으고, 공간은 기억을 품는다
문화학교를 나설 때, 기자는 잠시 운동장에 앉아 오래된 철봉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직도 ‘금이 간 페인트’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위엔 아이들이 만든 바람개비가 돌고 있었고, 창문 너머에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곳이 폐교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사람이 떠난 공간에 다시 사람이 들어오면, 그곳은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예술은 그 복원의 연결고리가 된다.
경북 영양의 문화학교는 그 사실을 가장 아름답게 증명해주는 공간이었다.
예술이란 대단한 기술이나 자본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곳은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폐교는 사라지는 공간이 아니라, 다시 쓰이는 가능성이다
기자는 문화학교를 나서며 마음속에 하나의 문장을 남겼다. “버려진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아직 다시 쓰이지 않았을 뿐이다.”
경북 영양의 이 폐교는 그렇게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창작, 교류의 장소가 되었다.
언젠가 이 학교에서 배움의 기쁨을 느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부모 세대,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예술을 배우는 새로운 아이들까지,
세대와 세대, 시간이 시간을 만나고 있었다.
이 작은 문화학교는 예술의 힘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선, 한 동네의 애정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폐교들이 이렇게 ‘기억을 품은 가능성의 공간’으로 다시 쓰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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