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활용공간 리뷰

폐교를 리모델링한 감정 공방 속으로

wellroundedboo 2025. 8. 10. 10:07

기자는 항상 ‘감정’이라는 것이 말로만 정리될 수 없는 것 같다고 느껴왔다.
특히 어떤 감정은 너무 무겁거나 복잡해서 그저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마음을 누르고 지나가거나 혼자서 삭히는 쪽을 선택하곤 한다.

그러던 중, 강원도 인제의 한 폐교가 ‘감정 공방’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곳은 단순한 도예 수업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도자기로 빚어내는 감성 체험공간이었다.
운영자는 예술심리상담사이자 도예가였고, 공방은 ‘감정을 물성으로 표현해보는 실험실’로 운영되고 있었다.

기자는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그 공간이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감정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이 폐교가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폐교 교실 안에 펼쳐진 조용한 리모델링 작업대들

기자가 도착한 날, 5학년 교실이었던 공간엔 작은 작업대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고 각 자리에 흙 한 덩이씩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말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감정 빚기 체험’은 도자기 기술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감정을 주제로 도자기를 빚는 과정 자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운영자는 기자에게 물었다. “요즘 자주 드는 감정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기자는 한참을 생각하다 “불안함과 무기력함이 동시에 있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운영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걸 모양으로 만들어보세요.
대신 잘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저 있는 그대로 표현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손끝으로 흙을 만지며 무언가를 말 없이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더 감각적이었고, 마음속 깊이 누르고 있던 감정이 조금씩 형태를 갖고 눈앞에 나타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감정 공방, 마음을 빚는 도자기 교실이 되다.

흙 위에 놓인 마음 하나

기자가 빚은 건 무언가 완성된 ‘그릇’이 아니었다. 불완전하고, 기울어지고, 가운데가 비어 있는 작은 조형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운영자는 그 조형물을 살펴보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비어 있는 게 아니라, 비워둔 거예요. 감정에도 공간이 필요하니까요.”

기자는 그 말을 들으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억지로 채우려 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기쁨, 슬픔, 외로움, 죄책감…
그 감정들이 모두 형태를 갖지 못한 채 속에서만 둥글게 맴돌았다는 사실을. 

이 공간에선 누구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작품엔 제목도 없고, 평가도 없으며 오직 본인의 손끝으로 만든 조용한 감정의 형상만이 남았다. 그 자체로 충분했고, 아름다웠다.

 

폐교, 감정이 살아 숨 쉬는 교실이 되다

감정 공방은 매주 주제를 정해 운영되는데, ‘잊고 싶은 감정’, ‘머물러 있는 감정’, ‘전하지 못한 말’을 테마로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빚고, 말하고, 남기는 시간을 가진다.
완성된 도자기는 일부는 가져가고, 일부는 공방 내 전시실에 남겨진다. 기자가 들른 전시 공간엔 수백 개의 감정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고, 각기 다른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는 모양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기억에 남는 작품 하나는 가운데가 뻥 뚫려 있고 그 주위가 바늘처럼 날카롭게 뻗은 조형물이었다. 
옆에 놓인 짧은 메모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늘 웃고 있지만, 안에는 무언가 텅 비어 있어요.”

기자는 그 형상을 보고 누군가의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형태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실감했다.
이 폐교는 이제, 감정을 말하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언어의 교실’로 바뀌고 있었다.

 

말로는 닿지 않던 마음들이 흙을 통해 이어지다

기자가 떠나는 날, 공방 입구엔 한 참여자의 메시지가 종이에 붙어 있었다.
“내가 만든 건 작은 조각이지만, 그걸 만들면서 나는 내 마음을 처음으로 알아봤습니다.”

그 문장은 기자에게도 그대로 와닿았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살아갈 때가 많다.
그럴 땐 말 대신 손으로 만지고, 빚고,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이 무엇보다 깊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교실이 보여주고 있었다.

감정 공방은 완성된 예술품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완성, 흔들림, 삐뚤어짐 속에서 더 진한 감정의 결을 발견한다.
기자는 그날, 자신의 감정을 빚어본 첫 경험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흙 속에서 자란다

기자가 만든 조형물은 완성도나 형태보다 손끝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을 위해 만든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운영자는 완성된 도자기를 가마에 넣으며 말했다. “감정도 흙과 똑같아요.
너무 세게 다루면 부서지고,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금이 가요. 적당한 온도에서, 조용히 식힐 줄 알아야 해요.”
그 말은 기자에게 도자기보다도 더 큰 울림을 남겼다. 기자는 그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내면에 말없이 눌러둔 감정들이 어떻게든 형태를 갖고 나올 수 있도록 스스로를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폐교는 감정이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다

교실은 사라졌지만, 배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전엔 시험을 위해 손을 움직였던 그 자리에서 이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자는 그 변화가 단순한 공간의 전환이 아니라 삶의 속도와 방향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내면의 교정’처럼 느껴졌다.

감정 공방을 나설 때 입구 옆 화분에 적힌 문구가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감정을 흙처럼 대하세요. 자주 빚고, 천천히 말리세요.”
그 짧은 한 줄은 기자의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사람의 감정은 설명보다 공감이 먼저이고 기록보다 존중이 먼저임을 이 교실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기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폐교는 더 이상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이제는 감정이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미래의 장소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