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활용공간 리뷰

폐교를 활용한 로컬 미디어 편집실 체험기마을

wellroundedboo 2025. 8. 3. 18:33

기자가 이 폐교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한 통의 로컬 뉴스레터 때문이었다.
“이 마을, 봄 감자 수확 시작…올해 작황 기대돼요”
처음엔 단순한 마을 알림 글처럼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문장이 따뜻하고 생생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이런 기사를 쓰고 있는 걸까?
궁금증은 기자를 강원도 인제의 산골 마을로 향하게 만들었다.

‘잉크학교’라는 이름의 이 공간은 1980년대에 세워져 2010년에 폐교된 분교를 리모델링해 지금은 로컬 미디어 편집실, 마을기자 교육센터, 커뮤니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인 미디어 시대,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지만 이곳은 오히려 그 흐름에 ‘느리게’ 대응한다.
누군가의 삶을 정확하게, 정직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곳.
바로 그런 철학이 이 공간을 움직이고 있었다.

 

폐교에 있는 분필 대신 노트북, 교탁 대신 편집 데스크

기자가 처음 마주한 교실의 모습은 낯설고도 익숙했다.
교실 벽에는 여전히 칠판이 있었지만 그 앞에 놓인 건 교탁이 아닌 편집용 모니터와 오디오 믹서였다.
이 교실은 지역 청년들과 마을 어르신들이 함께 운영하는 마을신문 <인제에서>의 실제 제작 현장이었다.

1학년 교실은 인터뷰 녹음실로, 과학실은 로컬 영상 촬영 편집실로 바뀌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마을 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기자는 그들과 함께 김밥을 나눠 먹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기사 스크랩을 기자에게 보여주며지난 계절의 마을 이야기를 들려줬다.
뉴스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느껴졌지만,이곳에서는 뉴스가 곧 일상이자 기억이었다.

편집실 한쪽 벽에는 "우리는 시간을 기록합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 문장을 바라보는 순간, 기자는 이 교실이 단지 폐교가 아니라 마을의 ‘기억 장치’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폐교를 활용한 로컬 미디어 뉴스가 시작되는 곳 편집실 체험기마을

기사를 쓰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법

기자는 당일 진행된 마을기자단 워크숍에 참여했다.프로그램은 단순했다.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고, 짧은 기사를 작성하는 것. 하지만 기자는 곧 그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인터뷰 대상은 70대의 농부였다. 기자는 “요즘 가장 걱정되는 일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감자 씨가 예전 같지 않아요. 땅이 달라졌어요.”
그 짧은 문장에 담긴 무게는 컸다. 그건 단지 농사 이야기만이 아니라, 기후 변화와 땅의 기억, 그리고 한 세대의 생존에 대한 말이었다.

기자는 그 말을 풀어내려 애썼고, 작은 기사로 정리하며 진심을 전하려 노력했다.
이곳에서 배운 건 기사 쓰는 기술이 아니라,‘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글쓰기’였다.
뉴스는 단지 정보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울림을 담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느린 편집실, 가장 빠른 공감의 공간

오후엔 실제로 마을 뉴스 한 회분을 편집하는 시간이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사진을 정리하고, 문장을 다듬고, 작은 교정 회의를 거쳐 마을회관 인쇄기로 넘긴다.
그 모든 과정은 디지털이지만, 분위기는 매우 아날로그였다.
느린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따뜻하고 생생했다.

기자는 그날 완성된 뉴스 파일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김 농부 인터뷰 – 땅은 기억을 잊지 않는다"
기사 끝엔 조그맣게 기자의 이름이 실렸다. 그 작은 서명 하나에, 기자는 묘한 책임감과 애정을 느꼈다.
폐교가 이렇게까지 살아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기자는 교실 창가에 앉아 마을에서 찍힌 사진들을 훑어봤다.
사진 속 사람들은 포즈를 취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 있었고, 일하고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든 장면이 하나의 뉴스장면이였다.

 

뉴스가 사라져도, 기록은 남는다

기자는 이 폐교가 단지 ‘옛 학교’를 대체하는 공간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록소’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왔다.
뉴스는 매일 바뀌고, 기사는 금세 잊히지만 이곳의 뉴스는 누군가의 삶을 보관하는 일종의 타임캡슐이었다.

기자는 방명록에 조심스럽게 적었다.
“이 교실은 여전히 사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네요.”

언젠가 이 폐교가 사라지더라도 이곳에서 남긴 기록들은 다른 공간,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래서 이 편집실은 멈추지 않는 신문사이며 조용한 마을에 흐르는 가장 깊은 뉴스의 근원이었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배움은 여전히 흐른다

며칠이 지난 후, 기자는 도시의 사무실에서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화려한 기사 제목들 사이에서 그때 썼던 “감자 씨 이야기”가 유독 선명하게 떠올랐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계절의 흐름, 땅의 변화, 그리고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담겨 있었다.
기자는 그날 이후로 ‘기록’이란 단어를 조금 더 무겁게 다루게 되었다.
단지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걸어온 시간 전체를 받아 적는 일이라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폐교는 사라진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배움의 방식을 일깨워주는 곳이었다.
책상도 칠판도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사람들의 목소리와 감정, 삶의 리듬이 앉아 있었다.
기자는 문득 깨달았다.
이 작은 편집실은 뉴스룸이자 교실이었고, 기록소이자 삶의 복도였다는 것을.

 

리가 남긴 뉴스는 누군가의 역사가 된다

편집실을 떠나던 날, 기자는 교실 창가에 잠시 멈춰 섰다.
그 창밖에선 여전히 어르신들이 감자밭을 일구고 있었다.
누군가는 또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고, 누군가는 다음 뉴스 편집을 위해 노트북을 열고 있었다.
그 풍경은 평범했지만, 기자에겐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날 기자가 써내려간 문장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기사였지만 누군가에겐 자신의 인생이 처음으로 기록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이 폐교가 가진 가장 조용하면서도 깊은 힘이었다.
학교가 남긴 것은 건물이 아니라, ‘기록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 태도는, 앞으로도 이 작은 편집실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