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활용공간 리뷰

폐교를 리모델링한 신비로운 계절 별장 체험기

wellroundedboo 2025. 8. 1. 14:44

기자는 늘 도시에서 계절을 스쳐지나갔다.
겨울은 출퇴근길의 찬 공기로, 봄은 회의실 창밖의 꽃으로, 여름은 에어컨 바람으로, 가을은 짧은 산책 중 스쳐가는 나뭇잎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매년 사계절을 ‘봤지만 살지 못한 채’ 지나보냈다. 그러던 중, 폐교를 계절 별장으로 리모델링한 공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원도 정선, 산 중턱 작은 초등학교. 이곳은 수십 년 전 문을 닫은 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폐교였다.
지금은 ‘사계절별장 정온당’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며, 계절마다 풍경과 기능이 달라지는 숙소로 다시 태어났다.
기자는 그곳에서 ‘계절을 머무는 법’을 배워보기로 했다.

별장은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TV도 없고, 와이파이도 약하며, 심지어 정해진 식사도 없다.
대신 이곳엔 바람과 햇살, 창밖 풍경, 나무 사이의 냄새, 그리고 느린 시간을 맞이할 준비만 되어 있다.

 

폐교 리모델링, 학교의 구조를 그대로, 계절만 입히다

기자가 도착한 계절은 늦가을이었다.
운동장은 마른 풀 향으로 가득했고 낙엽이 복도를 따라 흘러들고 있었다.
건물은 기존 초등학교 건물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고 1학년 교실은 ‘봄방’, 2학년은 ‘여름방’, 3학년은 ‘가을방’, 교무실은 ‘겨울방’으로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봄방에는 채광이 잘 드는 창이 있어 아침 햇살이 가득했고, 여름방은 커다란 창으로 숲이 바로 보였다.
가을방은 붉은 단풍나무를 마주한 벽면이 인상적이었고 겨울방은 벽난로와 두꺼운 러그로 따뜻하게 꾸며져 있었다.
기자는 가을방에 묵기로 했다. 창밖 단풍의 밀도와 교실 특유의 정적이 어우러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감정이 가득 찼다.

교실의 구조는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바닥만 보강하고, 창문엔 단열 필름을 붙였다.
책상 대신 작은 테이블과 1인용 소파가 놓였고, 칠판엔 ‘계절을 쓰는 칸’이라는 제목으로 숙박객들이 짧은 글을 남기고 있었다.

폐교를 리모델링한 신비로운 계절 별장을 체험하다

머무는 법을 가르쳐주는 느린 시간

별장의 하루는 느리게 시작되고 더 느리게 끝났다.
기자는 아침 7시에 눈을 떠 창문을 열었다.
산 속에서 올라오는 물안개와 찬 공기, 그리고 까마귀와 청설모의 소리로 ‘교실 밖 자연 수업’이 시작되었다.

식사는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공용 주방엔 마을에서 직접 가져온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기자는 호박과 무를 썰어 간단한 국을 끓였고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도시에서는 항상 바쁜 아침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식사도 계절의 일부’였다.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 천천히 마당을 산책하며 낙엽을 주워보기도 했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교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그 천장은 분명 수십 년 전에도 누군가가 그렇게 올려다봤을 것이다.
그 공통의 시선이 시간의 틈을 메우고 있었다.

 

계절은 풍경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다

기자가 이틀째 되던 날, 비가 내렸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도시의 소음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기자는 스피커도 음악도 없이 그저 비의 리듬에 맞춰 노트를 펼쳤다. “지금, 계절을 살고 있다”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 문장은 기자의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밤이 되면 별장은 더욱 고요해졌다. 가끔 벽난로에 나무를 더 넣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교실 조명은 따뜻한 색감으로 바뀌었고 예전의 형광등이 아닌, 감정을 위한 조명이 되었다. 기자는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이 폐교가 제공하는 것은 ‘머무름의 방식’이었다.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보다 더 중요한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을 새로 배우게 된 것이다.
이곳에선 계절이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었고 그 속에 있는 나 역시 한 장면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다시 떠나기 전, 계절에게 인사를 건넨다

떠나는 날 아침, 기자는 아직 어두운 운동장을 걸었다.
이른 아침 산속 공기는 서늘했고, 밤새 떨어진 낙엽이 발밑에서 사각거렸다.
별장 입구 옆 나무엔 누군가 손글씨로 써둔 문장이 걸려 있었다.
“잘 머무르셨나요? 다음 계절에도 다시 오세요.” 기자는 문득, 계절이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번 가을과 잠시 동행했으니 다음엔 겨울의 얼굴을 다시 보러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교는 계절을 가두는 곳이 아니라, 계절을 통과하며 나를 조금씩 바꾸는 장소가 되고 있었다.

도시로 돌아가는 길, 차창 밖 풍경이 조금 더 섬세하게 보였다.
가로수의 색, 하늘의 결, 바람의 방향. 폐교 별장에서의 며칠은, 기자의 계절 감각을 되돌려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감정의 책갈피로 남게 되었다.

 

계절은 다시 오지만, 같은 순간은 없다

기자는 도시로 돌아와서도 며칠간 그 공간을 자주 떠올렸다.
특히 가을방 창가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노트를 펼치던 그 순간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감정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건 단순한 숙박 체험이 아니라 기자의 삶에서 ‘빈칸’으로 남겨두었던 감각을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그날의 바람, 낙엽의 소리, 조용히 마시던 국물 한 모금, 그 모든 조각이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 속에 들어와 있었다.
폐교는 닫힌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소음 속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열린 침묵’을 건네주는 드문 장소였다.
기자는 그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과 오래간만에 대화를 나눴다.

 

계절과 나 사이, 공간이라는 다리를 건너며

별장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 기자는 그 공간이 단지 ‘이용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그곳은 계절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느린 다리였고, 시간과 감정을 연결해주는 작은 통로였다.
폐교라는 물리적 구조가 주는 정직함, 그 안에서 흘러가는 자연의 리듬,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일상의 조각들이
기자의 내면을 천천히 정리해주었다.

기자는 다음 계절에도, 그리고 다음 해에도 이 별장 같은 폐교에 다시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곳의 사계절은 항상 바뀌지만 그 안에서 나를 만나는 감정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도시의 속도에 다시 휩쓸리기 전에 기자는 그 감정을 조용히 가방 속에 담아 돌아왔다.
그 기억은 다음번 머무름을 위한 예고편이 되었다.

 

머무름이 준 가장 조용한 선물

며칠이 지난 지금도, 기자는 가끔 창밖을 보며 그 폐교를 떠올린다.
떠나온 공간이지만 마음 한켠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그곳은 계절이 아니라 감정이 머무는 장소였던 것 같다.
별장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어쩌면 ‘기억의 교실’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도 그 교실 안에서 나누었던 조용한 시간은 아직 흐르고 있다.
머무름은 그렇게,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기자의 삶에 깊은 선물 하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