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활용공간 리뷰

폐교를 활용한 독립출판소 체험기

wellroundedboo 2025. 7. 30. 02:44

기자는 책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누군가의 생각이 조용히 담긴 작은 독립출판물을 유독 애정한다.
세련된 편집보다 진심이 먼저 느껴지는 책 한 권은 때로 긴 여행보다 큰 울림을 남긴다.
그런 책이 ‘폐교’에서 만들어진다고 들었을 때 기자는 망설임 없이 가방을 쌌다.

경북 청송에 위치한 폐교 독립출판소 ‘문장학교’. 이곳은 2004년 폐교된 한 시골 분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출판창작 플랫폼이다.
기자는 이 공간에서 출판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고 활자가 공간에 남기는 감정의 잔상을 오롯이 느끼게 되었다.

그곳에는 종이 냄새가 있었고 낡은 교실에는 활자보다 먼저 사람의 숨결이 배어 있었다.
책은 누군가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다시 공간의 일부가 되어 기자의 기억 속에 깊게 남았다.

폐교 공간을 활용한 독립 출판소를 체험하다.

폐교가 문장을 품는 곳으로 다시 살아나다

‘문장학교’의 외관은 예전 초등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교문과 운동장, 나무로 된 창틀과 교실 배치까지.
하지만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자는 이곳이 ‘학교’이자 ‘인쇄소’, 그리고 ‘문장의 실험실’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1교시는 타이포그래피 이론, 2교시는 나만의 소책자 편집, 3교시는 인디고 프린터와 리소 인쇄 체험.
기자가 참여한 당일 프로그램은 이렇게 짜여 있었다.
학교의 시간표는 사라졌지만 배움의 구조는 여전히 이 공간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기자가 앉은 자리는 과거 학생들이 쓰던 나무책상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산 능선은 잉크에 물든 종이처럼 고요했다.
출판소 운영자는 말한다.
“이곳은 출판기술을 알려주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만의 언어를 찾도록 돕는 장소예요.”
기자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 공간의 진짜 목적을 이해하게 됐다. 출판은 종이를 넘기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꺼내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이라는 것을.

 

나만의 문장을 쓰는 체험, 느린 기록의 소중함

기자는 소책자 제작 체험에 참여했다.
제목은 “잊고 있던 나의 이야기”
A5 사이즈의 16쪽짜리 무선제본 소책자였다.
내용은 사전에 적어 온 글과 현장에서 수정한 에세이, 접 촬영한 사진 몇 장, 그리고 오늘 이 공간에서 느낀 한 문장이었다.

첫 장에는 기자의 글이 인쇄되어 나왔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을 적어두기 위해, 나는 종이를 선택한다.”
그 문장이 리소 인쇄기에서 파란 잉크로 토해지듯 나올 때 기자는 뭔가를 ‘만들었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진하게 느꼈다.

운영자는 말한다.
“디자인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는 이 사람만이 쓸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요.”
기자는 이 한마디가 독립출판이라는 문화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느꼈다.
상업성은 덜하더라도, 진심과 삶이 담겨 있다면 그 책 한 권은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었다.

체험이 끝나고, 서로의 소책자를 나눠 보는 시간이 있었다.
직장인이 쓴 ‘퇴사 후 100일’, 마을 어르신이 쓴 ‘우리 동네 옛 이야기’,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 만든 ‘엄마의 손글씨 수집기’ 그 책들은 작지만, 사람을 울리는 문장이 담긴 ‘작은 우주’였다.

 

폐교는 언어를 다시 가르치는 공간이 된다

‘문장학교’는 단순히 인쇄 체험만 하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지역 청소년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문해력 프로그램, 에세이 쓰기 워크숍, 마을신문 만들기 수업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날 오후에는 중학생 5명이 ‘내 이름으로 쓰는 첫 번째 칼럼’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 학생이 발표한 첫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말이 느리고, 글이 빠르다.” 기자는 그 문장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 공간이야말로, 느린 말투를 가진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기회를 주는 장소라는 것을.

운영자는 “학교가 사라졌다고 해서 배움이 끝난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을 쓰는 일이 곧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면 이 폐교는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출판이라는 행위는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자연의 속도, 종이의 질감, 공간의 감도와 함께하는 것은 오직 이런 폐교 공간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활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도 그렇다

기자가 만든 소책자는 끝내 잘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를 남긴 채 가방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길 내내, 기자는 책장을 넘겨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오늘 쓴 문장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잊고 있던 감정을 기록한 도구였다는 걸. 기자는 폐교라는 공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은 단지 활용되지 못한 유휴 건물이 아니라 다시 이야기를 쓰고, 삶을 재정비하는 '언어의 재생공간'이라는 것.
낡은 교실에서 시작된 작은 문장 하나는 누군가의 내면을 조용히 흔들 수 있었고 그 진동은 활자를 통해 오래도록 남게 된다.

독립출판은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진심과 정성을 담은 한 권의 책은 어떤 서점의 베스트셀러보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기자는 이 폐교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번엔 기자가 아닌 독자로 그 공간을 다시 찾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에서 갓 인쇄된 따뜻한 문장을 조용히 넘겨보며 또 다른 감정을 느끼고 싶다.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그 공간도 그 이야기를 잊지 않을 것이다.

 

오래된 공간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문장들

며칠이 지나 집 책상 위에 놓인 소책자를 다시 펼쳐본 기자는 문득 깨달았다.
그날의 감정, 바람, 잉크 냄새까지 문장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책은 단지 종이로 만든 물건이 아니라 공간과 시간, 그리고 감정을 고정시키는 도구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문장학교는 기자에게 단순한 체험장이 아닌 ‘기억의 인쇄소’로 남았다.
이곳에서 쓴 글은, 다시 이 공간을 떠올리게 했고 그 기억은 다시 다음 문장을 쓰게 만들었다.
오래된 폐교는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문장을 가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