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활용공간 리뷰

강릉 폐교 미술관 리뷰: 바닷바람과 함께 걷는 감성 전시 공간

wellroundedboo 2025. 7. 24. 21:26

강릉은 바다로 유명하다. 커피 거리도 있고, 주문진도 있고, 바다 열차도 있지만 이 도시에는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깊은 공간이 있다.
산과 바다의 경계가 겹치는 작은 마을, 아무도 찾지 않던 폐교 한 곳이 지금은 예술을 담은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 오직 걷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미술관은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낡은 학교의 모습 그대로지만, 교실마다 설치된 작품들과 교무실에 흐르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그리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방문객을 단순한 관람객이 아니라 ‘머무는 감상자’로 바꿔놓고 있었다.

이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예술 전시장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치유의 장소였다.
기자는 이곳이 단순히 폐교를 리모델링한 공간이 아닌, 그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강릉 바닷가 마을로 향했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공간은 조용했고,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강릉 폐교라는 구조 안에 담긴 의외로 섬세한 미술관

이 미술관의 전신은 1985년에 개교해 2006년에 폐교된 한 분교였다.
총 4개의 교실과 교무실, 강당, 운동장을 가진 작은 규모였지만, 지금은 그 모든 공간이 다른 쓰임으로 채워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교실 하나를 통째로 리모델링한 전시실이었고 칠판 위에는 지역 작가의 풍경화가 걸려 있었으며, 교탁 자리엔 흙으로 빚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천장은 그대로였지만, 벽 한쪽을 따뜻한 흰색 회벽으로 바꿔 그림이 자연광을 받도록 했고 바닥은 나무를 덧대어 관람객의 발걸음이 조용히 울릴 수 있게 배려되어 있었다.

교실 하나하나에 들어갈 때마다, 마치 작품 속으로 발을 들이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은 어렵지 않았고, 설명문은 길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공간 전체가 주는 분위기 덕분에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느낀다는 말이 더 어울릴 만큼 자연스럽게 몰입되었다.
“이런 공간이 예술을 가장 편하게 만들 수 있구나.” 기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릉 폐교가 바닷바람과 함께 걷는 감성 전시 공간 미술관으로 변하다

바닷바람이 작품과 감정을 동시에 흔들어주는 공간

운동장은 지금은 조각 정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곳에는 바다에서 주운 폐그물로 만든 설치 작품, 녹슨 철을 구부려 만든 고래 조각, 그리고 바닷가에서 가져온 유리조각으로 만든 벤치가 놓여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가 마을의 풍경과 닮아 있었고, 그 옆엔 짧은 설명이 아닌 작가의 ‘고백’이 적혀 있었다.
“나는 어릴 때 이 학교 운동장에서 바다를 보며 자랐다. 그때의 기억을 흙과 쇠로 다시 만들었다.”
그 한 줄이 작품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다.

작품 감상 중간중간, 바람이 불어오면 바닷소리가 살짝 들려오고 유리창이 달그락거리고, 잔잔한 물결 소리가 작품 너머에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미술관은 정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그 잔잔한 자연의 소리가 오히려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관광지가 아닌 ‘머무는 장소’로서의 폐교 미술관

이 폐교 미술관은 입장료가 없다.
대신 입장할 때 작은 노트와 연필이 주어지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면 느낀 점이나 기억나는 장면을 한 문장 적어달라고 한다.
기자는 그게 무척 인상 깊었다.
“기억은 남기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
운영진의 철학이 문구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다.

이곳을 운영하는 예술가는 서울에서 활동하다 귀향한 40대 중반의 작가였다.
그는 “이 공간은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마을을 위한 장소이고, 누군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그늘 같은 역할이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주말에는 지역 아이들과 함께 하는 드로잉 클래스 평일 오후에는 마을 주민을 위한 공예 워크숍도 열린다.
폐교 미술관은 단지 전시장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문화 사랑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예술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으로 이어지는 다리였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교무실을 개조한 작은 북라운지였다.
거기엔 지역 예술 관련 책과 사진집, 예전 학교 문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 우연히 발견한 문장 하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곳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문장이 이 폐교 미술관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학교였던 공간은 지금도 배움을 담고 있었다.
다만 배움의 대상이 책과 지식이 아닌, 사람과 감정, 예술과 자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기자는 이 미술관을 나서며, 작품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건 아마 이 공간 자체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교실 안엔 여전히 조용한 숨소리가 흘렀다.
그 순간 기자는 생각했다.
폐교는 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작일 수도 있다고.

 

작품보다 오래 남는 건 결국 공간이 주는 감정이었다

미술관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곳엔 특별한 전시물이 없었지만, 바람과 나무 그림자, 옛 철봉과 부서진 시멘트 바닥이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기자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미술관이 주는 감동은 눈에 보이는 예술보다, 시간이 흐르며 쌓인 공간의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화려한 전시 기획이 없어도, 유명 작가의 이름이 없어도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폐교 미술관이 보여주고 있었다.
강릉의 조용한 마을에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결국, 예술이란 무엇을 보는가보다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마주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