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 폐교 갤러리에서 만난 할머니 작가 이야기
사람들은 예술을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큰 도시, 유명 작가, 값비싼 화구와 갤러리 조명 아래서만 예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전라북도 정읍의 한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는 그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폐교가, 지금은 할머니 작가의 갤러리이자 작업실로 바뀌어
조용히 예술의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 초등학교로 운영되던 작은 시골 학교다.
폐교된 이후 수년간 방치되었고, 낡은 책상과 칠판이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건물이었다.
하지만 2019년, 정읍에 사는 70대 중반의 한 할머니가 이 폐교의 일부를 임대받아
자신만의 갤러리 공간으로 꾸미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다시 사람을 부르는 공간이 되었다.
기자는 ‘할머니 작가가 폐교를 갤러리로 만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사연을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전북 정읍 폐교, 한 할머니의 선택은 “그림은 그냥 마음으로 그리는 거지요”
그녀의 이름은 박순덕, 올해 일흔일곱.
젊은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미술을 배워본 적은 없다고 했다.
젊을 땐 농사를 짓고, 자식들 키우느라 붓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단다.
하지만 자식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고, 남편도 먼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붓을 다시 잡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게 외롭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낡은 스케치북을 꺼내보니 마음이 좀 놓였어요. 그냥 그리다 보니… 마음이 풀렸지요.”
그녀는 그렇게 매일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수백 점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전시해 보라”며 응원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을 근처 폐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면사무소에 문의해 학교 일부 공간을 임대받아 직접 갤러리를 만들었다.
손수 청소하고, 페인트를 칠하고, 교실 한쪽에 자신의 그림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싼 액자도 못 쓰고, 그냥 나무 판에 붙였어요. 그런데도 누가 보러 오면 참 기쁘지요.”라고 말했다.
그 말투엔 부끄러움보다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폐교는 그녀의 ‘집’이자 ‘캔버스’가 되었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그리 넓지 않은 교실이 하나 나온다.
칠판 위엔 연필로 그린 작은 풍경화들이 붙어 있고, 창가에는 색연필로 그린 정물화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작품 중 일부는 전혀 전문적인 기법 없이 그려졌지만, 그 속엔 사람의 손맛과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교실 뒤편엔 그녀의 작은 작업대가 놓여 있다.
물감과 붓, 마른 꽃다발, 다 마신 요구르트 병에 꽂힌 연필들까지.
그녀는 “이 학교도, 나도, 다 낡았지만 아직 쓸모는 있다”며 웃었다.
사실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방문객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더 많다고 했다.
“누가 와서 그림 보면서 ‘엄마 생각난다’고 하면 그게 제일 좋아요.”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팔지도 않고, 관람료도 받지 않는다.
다만 방명록에 방명만 남겨달라고 부탁한다.
그녀에게 이 공간은 작품 판매를 위한 전시장이 아니라,
“사람들 기억이 왔다 갔다 하는 다리 같은 곳”이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진짜 예술 공간’
정읍의 이 폐교 갤러리는 그녀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다.
주말이면 동네 어르신들이 들러 차를 마시고, 아이들은 크레파스를 들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다.
한쪽 교실은 마을 주민을 위한 작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되며,
계절마다 ‘마을 사람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우리 마을엔 예술인이 없어요. 근데 이렇게 모여서 서로 그림도 걸고, 얘기도 하다 보니까… 살맛이 나더라고요.”
기자는 그런 말을 들으며, 예술이란 결국 함께하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 폐교는 더 이상 폐허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기고, 누군가의 인생이 녹아드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년 연말이면 ‘1년 그림 결산전’을 열어 1년 동안의 그림을 다 걸고,
작은 동그란 떡을 나눠주며 마을 축제처럼 진행한다.
그날은 갤러리가 아니라, 동네 사랑방 그 자체가 된다.\
사라진 공간 위에 피어난 ‘기억의 미술관’
기자는 갤러리를 나서기 전, 방명록에 이렇게 남겼다.
“오늘 여기서 할머니의 그림을 보며 저희 어머니가 그리워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서기 전, 할머니가 말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냥 마음으로 그리는 거예요. 나이 들어도 그건 할 수 있어요.”
정읍의 이 작은 폐교는 이제 한 할머니의 삶을 담은 기억의 미술관이 되었다.
화려한 조명도 없고, 기획전도 없고, 관람료도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느 유명한 미술관보다 깊고 진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림은 기술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정읍의 폐교 갤러리를 떠나며 기자는 마음속에 하나의 문장을 오래 간직하게 되었다.
“그림은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낸 사람이 그리는 거다.”
박순덕 할머니의 손에서 나온 그림들은 형태보다 마음을 먼저 건드렸고, 기술보다 기억을 먼저 이야기했다.
교실이었던 공간, 칠판 위에 걸린 풍경화 한 장, 손글씨로 적힌 설명문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폐교는 더 이상 기능이 멈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오히려, 이제야 비로소 누군가의 시간을 받아줄 준비가 된 가장 정직한 갤러리였다.
기자는 이곳을 떠나며, 앞으로도 이런 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품게 되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닿은 곳, 그곳이 바로 예술의 시작점이라는 걸, 이 폐교가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