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을찾아서

부여 전통 장 담그는 집, 자연 발효 20년 외길 인생

wellroundedboo 2025. 6. 28. 07:42

 충청남도 부여, 백제의 고도이자 농촌의 풍요로움이 남아 있는 이곳에는 시간마저 느리게 흐른다. 이 조용한 마을의 언덕배기, 마당 가득 장독대가 늘어선 한 집이 있다. 이 집은 20년 넘게 인공첨가물 없이 ‘자연 그대로’의 발효만으로 된장, 간장, 고추장을 만들어왔다. 대형마트에서 몇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장이지만, 이 집의 장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닌 사람의 손과 계절이 빚은 결과물이다.

이 집을 운영하는 부부는 장을 담근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매년 1월이 되면 손이 떨린다고 말한다. “장은 속이지 못해요. 그해 날씨가 어땠는지, 재료가 얼마나 정직했는지가 다 드러나죠.”라고 남편은 말한다. 이들은 매년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정성으로 장을 담근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조금씩 다르다. 바로 그 차이가 이 장을 ‘살아 있는 음식’으로 만들어준다.

이 글은 한 부여 가정의 장 담그는 철학과 삶의 태도를 기록한 것이다. 발효라는 느린 과정을 통해 얻은 맛과 신념, 그리고 잊히지 말아야 할 한국 전통 음식 문화의 본질을 되짚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여 전통 장, 메주 자연발표
부여 메주

 

메주에서 시작되는 장의 기본 – 정성은 첫날부터 시작된다

 장을 담그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모든 것은 ‘메주’에서 시작된다. 이 집은 가을에 직접 콩을 삶고, 절구에 찧어 손으로 뭉쳐 메주를 빚는다. 그 메주를 볕과 바람에 수개월 말려 곰팡이를 띄우고, 다시 띄운 메주를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에 담가 숙성시킨다. 이 과정에서 들어가는 재료는 단 세 가지뿐이다. 국산 콩, 천일염, 그리고 시간. 어떠한 화학 첨가물도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온도와 공기 흐름’이다. 장은 살아 있는 발효식품이기 때문에 메주에 피는 곰팡이, 염도가 스며드는 속도, 간장의 빛깔까지 모든 것이 매일 달라진다. 그래서 부부는 매일 아침마다 장독대를 한 바퀴 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고, 색을 보고, 손으로 저어본다. 그는 말한다. “장이 말하는 걸 들어야 해요. 잘 됐는지, 지금 뭘 원하는지.”

고추장을 담글 때도 마찬가지다. 메줏가루, 찹쌀풀, 고춧가루, 조청 등을 넣고 3일 이상 치대야 한다.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 놓고 발효시키고, 여름에는 시원한 창고로 옮겨야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 시중에서 파는 고추장과는 깊이부터 다르다. 단맛보다 짭짤하고, 텁텁하지 않으며, 된장과 섞어 찌개를 끓이면 마치 오래 끓인 국물처럼 진한 감칠맛이 우러난다.

 

장을 담그는 삶 – 매일의 손길로 이어진 철학

 이 집에서는 장 담그는 날이 한 해 농사의 절반이라고 말한다. 해마다 음력 정월 중 맑은 날을 골라 메주를 담그고, 항아리를 닦고, 염도를 재는 일에 온 가족이 나선다. 그날은 작은 명절과 같다. 온 마을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항아리를 점검하고, 서로의 메주를 비교해본다. 발효라는 과정 속에는 공동체의 문화까지 자연스레 스며든다.

이 집의 부부는 장을 담그는 일을 ‘산소 관리’라고 말한다. 장독대가 단지 발효 공간이 아니라 조상처럼 돌보고 지켜야 할 존재라는 의미다. 실제로 그들은 장 항아리를 매주 한 번씩 닦고, 뚜껑의 먼지를 털고, 정기적으로 햇볕을 쐬어준다. “장이 곰팡이 피면 다 버려야 하는 거잖아요. 그걸 피하려면 매일 들여다봐야죠. 장은 하루도 안 보면 삐져요.”라며 웃는다.

하지만 이 정성은 단골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장을 사러 오는 이들 중엔 수도권에서 택배를 신청하는 이들도 있고, 아이가 아토피가 있어 시판 장을 못 먹는다는 이유로 이 집 장만 고집하는 고객도 있다. 한 번 맛본 사람은 다시 돌아온다. 그 이유는 맛의 차이도 있지만, ‘정성’이 주는 신뢰감이 더 크다.

 

전통이 살아남으려면, 사람 손이 끊기지 않아야 한다

 부여의 이 장 담그는 집은 이제 귀하게 여겨진다. 마을에서도 이만큼 꾸준히, 정성 들여 장을 담그는 집은 많지 않다. “이웃들도 한때는 다 했지만, 힘들고 귀찮다고 점점 안 하게 됐죠.” 장인의 말처럼, 장 담그는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신 편의성과 효율성에 밀려 공장에서 만든 장이 일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매해 같은 날, 같은 방법으로 장을 담근다. 제자도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건 그냥 흉내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마음이 있어야 장이 따라와요.” 전통은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그의 말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직접 담근 장을 매년 무료로 나눔 행사에 기부하기도 한다. 그 행위는 단지 나눔이 아니라, 전통의 생존을 위한 실천이다.

이 집 장독대 옆에는 해마다 새로 칠한 작은 팻말이 걸려 있다. ‘장을 담그는 마음은 사람을 담그는 마음입니다.’ 그 글귀처럼, 이 집의 장은 단순히 발효 식품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뿌리이자 공동체의 기억이다.

그리고 오늘도 부부는 아침마다 장독대 뚜껑을 연다. 볕이 좋은 날엔 항아리를 마당 한가운데로 옮기고, 소금이 굳지 않았는지 살핀다. 그들의 하루는 장에서 시작되고, 장으로 끝난다. 이처럼 시간이 만들어낸 음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전통을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 집의 장은 이제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사람의 시간이 담긴 음식’으로 기억된다. 누군가는 이 장을 먹으며 어릴 적 외할머니 댁을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처음으로 ‘진짜 된장찌개’의 깊이를 알게 된다. 이처럼 발효는 맛을 숙성시키는 동시에 감정과 기억도 함께 익힌다. 그래서 이 장은 오래될수록 진하고, 나눌수록 따뜻하다. 부여의 이 작은 장독대 마당은 그렇게 오늘도 조용히, 전통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