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을찾아서

남해 전통 향초 장인, 풀과 기름으로 빚은 조용한 불빛

wellroundedboo 2025. 7. 13. 23:22

경남 남해의 바닷가 마을, 조용한 대나무숲 사이에 작은 공방 하나가 숨어 있다.
그곳엔 불이 켜지지 않아도 은은한 향기가 맴돌고 촛불 없이도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그 향기는 꽃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인공 향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마치 숲속 흙냄새, 마른 풀잎, 햇살에 덮인 대지처럼 은은하면서도 깊다.
그 향을 담은 이는 정하영 장인, 28년째 천연 재료만으로 향초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밀랍, 콩기름, 솔잎, 말린 허브, 감잎, 쑥, 계피껍질 등을 오랜 시간 달이고 졸여 향을 만든다. 그에게 향초는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불빛에 담긴 감정과 기억의 도구”다. 그래서 정하영 장인은 향초 하나를 만들면서, 향보다 먼저 불이 머무를 공간의 온도를 떠올린다.

 

향초의 시작은 풀잎이다 – 식물에서 빛을 짜내는 일

정 장인이 만드는 향초는 대부분 천연 식물에서 비롯된다. 그는 향을 직접 짓기 위해 매일 아침 풀을 채취한다. 주로 사용하는 식물은 감잎, 쑥, 솔잎, 계피, 마른 귤껍질, 산초나무잎 등이다. 모두 주변 산과 밭에서 직접 채집하거나 말린 재료로 준비한다. “뿌리보다 잎과 껍질이 향이 맑아요. 불에 타도 오래 남고 머리가 아프지 않죠.” 그는 식물을 손질해 물에 불리고, 중탕으로 서서히 우려낸다. 한 번 끓는 게 아니라 3~4시간 이상 뭉근히 향을 빼는 것이다. 그 향유는 천연 밀랍이나 콩기름, 유채기름 등 식물성 왁스와 섞인다. 정 장인은 꿀벌이 만든 밀랍을 직접 여과해 사용한다. “촉감이 달라요. 기계 왁스는 질감이 막히고, 밀랍은 숨을 쉬죠.” 식물의 향이 기름 속에 스며들면서 불이 붙었을 때 공기 속으로 퍼지는 향은 훨씬 부드럽고 단정하다. 그는 식물마다 온도를 다르게 설정한다. “쑥은 낮은 온도에서 우려야 하고, 감잎은 오래 달여야 해요.” 그는 모든 향초의 레시피를 손으로 적은 노트에 기록한다. 온도, 시간, 바람의 세기, 재료의 감촉까지 그의 향초는 철저한 자연 감각의 산물이다.

 

불이 타기까지 – 왁스와 심지의 조화

향초는 향만 좋다고 끝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불이 머무는 시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정 장인은 심지를 직접 꼬아 만든다. 면 100% 원사를 삶아 불순물을 제거하고, 식물성 왁스에 담가 굳히기를 반복한다. 이 심지를 자연 건조해 굳힌 다음 향초 가운데에 수직으로 고정시킨다. “불은 중심이 흐트러지면 안 돼요. 심지는 촛불의 중심이에요.” 그래서 그는 향초를 붓고 굳히는 작업을 아침 햇살 아래서만 한다. “해가 떠오르면 기온이 일정해서 심지가 중심을 유지해요.” 향초의 용기는 재활용 유리병이나 소박한 흙그릇, 나무로 만든 틀을 쓴다. 그는 “향초는 담기는 그릇에 따라 성격이 달라져요”라고 말한다. 유리에는 차분한 향, 나무에는 따뜻한 향, 흙에는 무거운 향을 담는다. 심지의 위치, 왁스의 비율, 향의 농도까지 모두 촛불의 흐름과 타는 시간을 고려해 계산한다. 그래서 그의 향초는 2시간 이상 꺼지지 않고 고르게 탄다. 그는 말한다. “불빛이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도 덜 흔들려요.” 그가 다루는 것은 불이지만, 실은 사람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감잎과 쑥으로 만든 천연 향초가 유리병에 담겨 굳어가는 장면

향초는 기억을 불러오는 불빛이다 – 마음을 밝히는 감각

그는 말한다. “좋은 향은 설명보다 기억을 먼저 데려와요.” 그래서 그는 향초를 만들면서 늘 사람을 떠올린다.
어떤 사람은 피로한 하루를 정리할 때, 어떤 사람은 슬픈 밤에 혼자 있을 때,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향초를 켤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향초는 단지 방을 밝히는 도구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손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그는 상품명을 쓰지 않는다. 대신, 향초마다 “봄비 내린 날의 쑥”, “마른 대나무 그림자”, “감잎이 노랗게 바래던 오후” 같은 제목을 붙인다. 그건 향의 재료가 아니라, 향초를 만든 시간과 그가 느낀 감정이다. 그는 말한다. “향초는 설명서로 파는 게 아니에요. 그 불빛을 켰을 때, 그 사람이 무슨 기억을 꺼내느냐가 진짜죠.” 그래서 그의 향초는 향보다 더 긴 여운을 남긴다.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켜는 순간 누군가의 마음에 도달한다.

 

시간이 남긴 불빛 – 사라지는 대신 오래 남는 것

요즘 많은 이들이 그의 향초를 찾는다. 시끄러운 도시에서 돌아와 조용히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혹은 소중한 누군가에게 불빛 하나를 선물하고 싶어서. 그는 손님을 ‘고객’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 촛불을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운 거죠.” 그의 향초는 상자에 담겨 누군가에게 배달될 때까지 한 번도 기계의 손을 거치지 않는다. 모든 건 그의 손과, 풀, 기름, 바람, 그리고 불로 만들어진다. 그는 향초가 타고 사라질 때마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부드럽게 퍼지길 바란다. 그래서 향초 하나를 만들면서도 그 불이 켜질 장소, 그 옆에 있을 사람, 그날의 공기까지 생각한다. 그가 만든 향초는 결국 향이나 불빛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조용한 마음 한 조각이다. 남해의 풀과 기름,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나온 그 향은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안아주는 불빛이 된다. 그 불은 작고 짧지만,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불이 꺼진 뒤에도 남는 것 – 향초가 남긴 자리에 대하여

정하영 장인은 말한다. “향초는 결국 사라지는 물건이에요. 그런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그의 말처럼, 향초는 타고 나면 남지 않는다. 불빛도, 향도, 촛농도 모두 녹아내려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가 오히려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불이 있던 자리는 조용해요. 그곳에서 울었던 사람도, 웃었던 사람도 다 불빛 하나로 정리돼요.” 그가 만드는 향초는 그래서 장식이 아니다. 눈에 띄는 디자인 대신, 눈을 감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담는다. 그 향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 감정을 기억한다. 그는 오늘도 풀을 말리고, 기름을 데우고, 심지를 꼰다. 누군가의 고요한 밤을 밝혀줄 아주 작은 불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 불이 사라진 후에도, 마음 한켠에 오래 남을 향을 남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