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수제 고추장 장인, 장독 위 햇살로 익힌 붉은 시간
고창은 햇살이 좋다. 바람은 차분하고, 땅은 짠기를 품고 있다.
이곳의 장독대에 놓인 고추장 단지는 매일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숨을 쉰다.
이 고추장을 만드는 장인은 40년째 불을 쓰지 않고도 뜨거운 발효를 이끄는 손의 기억으로,
붉은 장을 빚는다.
“고추장은 조미료가 아니라 기다림이에요.”
그는 매일 아침, 장독대 앞에서 고추장의 표면을 살핀다. 거품이 오르지 않는지, 색이 탁해지지 않았는지.
그의 고추장은 맵지도, 달지도 않다. 하지만 한 숟갈만 찍어도 밥 한 그릇이 사라진다.
이 글은 고창의 햇살과 땅, 장인의 숨결로 익은 전통 고추장 한 단지의 깊은 시간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고창 고추장맛은 재료에서 시작된다 – 콩, 쌀, 고추의 조화
고추장의 시작은 콩이다. 그는 국산 콩 중에서도 기름기 없는 메주콩을 사용하고 고창 일대의 밭에서 자란 콩을 직접 골라 가마솥에 삶고, 절구로 찧어 메주를 쑨다.
“좋은 메주는 잡냄새가 없고, 바람결 따라 향이 나요. 비 온 뒤 흙냄새처럼.”
고추장은 고춧가루만으로 맛을 내는 게 아니다.
찹쌀, 엿기름, 천일염, 메주가루, 이 다섯 가지가 정확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는 찹쌀을 씻어 불린 뒤, 옛날 방식 그대로 시루에 찐다.
찹쌀이 말랑하면서도 알이 살아 있어야 발효가 천천히 진행되고 단맛이 오래 지속된다.
찹쌀이 식으면 엿기름물을 붓는다.
엿기름은 쌀을 싹틔운 뒤 말려 빻은 것으로, 전통 고추장에서는 자연 당화(糖化)를 일으키는 핵심 재료다.
그는 직접 엿기름을 만들어 쓴다.
“엿기름이 살아 있어야 단맛이 도는 거예요. 엿기름 죽에서 달큰한 냄새가 올라올 때, 그때가 시작이에요.”
마지막으로 고춧가루와 메주가루, 소금을 넣고 한참을 손으로 섞는다.
“여기선 계량보다 손맛이 중요해요. 손이 밀릴 때까지 저어야 해요. 그럼 어느 순간 장이 말랑해지거든요.”
그는 손끝으로 재료를 기억하고, 그 기억으로 다음 해의 비율을 조정한다.
고추장은 불이 아니라 햇살로 익는다 – 장독의 시간
모든 재료가 섞이면 고추장은 장독으로 옮겨진다.
그는 말한다. “고추장은 익히는 게 아니라, 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장독은 깊고 둥글며, 햇빛과 바람이 스며들 수 있도록 남향으로 배치한다.
고추장은 발효 과정에서 표면에 거품이 올라오거나, 표피가 생기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매일 장독 뚜껑을 열어 고추장 상태를 확인한다.
“숨이 막히면 맛이 써져요. 장도 사람처럼 숨 쉴 공간이 필요해요.”
고추장은 계절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여름엔 부풀고, 겨울엔 조용하다.
그는 온도계 없이, 장의 색과 향, 점성을 본다.
“장독 뚜껑을 열었을 때 코끝이 찡하면, 장이 제대로 익고 있다는 증거예요.”
그는 고추장 표면을 손으로 눌러보며 수분 농도를 확인한다.
너무 묽으면 장이 무르고, 너무 되면 발효가 느려진다.
그래서 장독마다 고추장 상태를 기록한 노트를 따로 둔다.
이 노트는 시간의 기록이며, 장인의 감각이 쌓인 작은 역사서다.
맛은 첨가물이 아니라 발효가 만든다 – 느린 단맛의 완성
요즘 시판 고추장은 대부분 물엿과 액상과당으로 단맛을 낸다.
하지만 그의 고추장은 자연 당화를 통해 얻는 단맛이다.
이 단맛은 입에 닿는 순간은 은은하지만, 씹고 넘긴 후에 감칠맛과 함께 다시 살아난다.
“요즘 장은 한 숟갈에 맛을 확 보여주려 해요.
근데 진짜 장은 시간이 지나야 입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요.”
그의 말처럼, 고추장의 맛은 겉이 아니라 속에서 천천히 드러난다.
그는 1년 이상 묵힌 장만 판매한다.
그 전에는 ‘숙성 중’이라며 절대 팔지 않는다.
고추장 색이 검붉게 변하고, 냄새가 된장처럼 깊어질 때,
비로소 “장이 자기 성격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손님에게도 고추장 쓰는 법을 함께 전한다.
“너무 많이 넣지 마세요. 한 숟갈이면 충분해요.”
그의 장은 자극보다 균형을 추구한다.
그 속엔 짠맛, 단맛, 매운맛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풍미의 조화가 있다.
장은 사람에게로 가야 한다 – 나누는 마음의 맛
그는 매년 봄, 장 나눔 행사를 연다.
사찰, 요양원, 독거 어르신 댁에 고추장 단지를 전달하며, 그 집의 식탁을 떠올린다.
“장이 밥상에만 올라가면 안 돼요. 마음까지 닿아야 진짜 장이에요.”
그는 고추장을 전통시장에서도 팔지만, 온라인 주문은 받지 않는다.
장맛은 만나서 말도 나누고, 냄새도 맡아본 후에야 전할 수 있다는 철학 때문이다.
“고추장 맛은 먹기 전에 이미 반쯤 결정돼요. 그 사람의 기분, 계절, 공기, 이런 게 다 장맛을 만들거든요.”
최근에는 젊은 농부들과 함께 발효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고추장뿐 아니라 된장, 간장, 식초 등 모든 발효의 기본을 알려준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술은 어렵지 않아요. 문제는 기다릴 줄 아느냐예요.”
오늘도 고창의 장독대 위, 햇살이 붉게 내려앉는다.
그 속엔 불도, 소리도, 광고도 없다.
다만 손의 감각, 콩의 숨결, 고추의 향, 그리고 햇빛의 온기가 담겨 있다.
그가 만든 고추장은 맛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으로 먹는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