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을찾아서

장성 백양사 국수 장인, 물 흐르듯 면을 뽑는 고요한 기술

wellroundedboo 2025. 7. 8. 06:00

 전라남도 장성 백양사. 단풍으로 유명한 이 사찰은 그 풍경만큼이나 깊은 맛을 지닌 음식이 있다. 바로 백양사 국수다.
이 국수는 단순한 사찰음식이 아니다. 백양사에 머무는 스님들과 방문객, 그리고 인근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채워온 고요하고 정직한 한 그릇이다.
그 국수를 40년 넘게 직접 뽑아온 국수 장인은 말한다. “국수는 물처럼 흘러야 해요. 흐르지 않으면 끊어지고, 조르면 딱딱해지죠.”
그의 말처럼 국수는 힘으로 뽑는 게 아니라 물처럼 흐르는 마음으로 빚어야 나오는 음식이다.
이 글은 한 사찰 국수 장인이 밀가루와 물, 기다림과 마음으로 면 한 가닥을 만들어낸 조용한 기술의 이야기다.

 

사찰 국수는 욕심을 빼는 일부터 시작된다 – 반죽의 시간

 그가 만드는 국수의 재료는 단순하다. 밀가루, 물, 소금. 끝이다.
계란도, 기름도, 감미료도 쓰지 않는다. 사찰음식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재료일수록 그 사람의 손맛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은 그날의 습도에 따라 다르고, 밀가루도 매해 성격이 달라요. 반죽은 정답이 없어요.”

그는 반죽을 기계로 하지 않는다. 커다란 양푼에 밀가루를 담고, 손등으로 누르며 치대는 방식이다.
“처음엔 마른 듯하다가, 나중에 손바닥이 축축해져요. 그럼 물이 도는 거예요.”
그는 이 과정을 “밀가루와 손이 대화하는 시간”이라 말한다.

국수는 반죽만 잘해도 절반이 완성된다. 너무 치대면 질기고, 부족하면 끊어진다.
그는 손가락 관절로 밀가루의 수분 균형을 읽는다. 반죽은 2시간 이상 천으로 덮어 숙성시킨다.
“숙성은 반죽을 편하게 해줘요. 마음처럼, 쉬어야 부드러워져요.”

반죽이 쉬고 나면 다시 한 번 눌러 치대고, 길게 늘여 성형한다. 이때 면의 탄력이 결정된다.
사찰 국수답게, 그는 욕심을 빼고 오직 필요한 만큼의 힘만 쓴다.
그는 말한다. “국수는 강해지려 하면 끊어져요. 순해지려 해야 길게 가요.”

 

면을 뽑는 손은 기계보다 조용하다 – 가락의 감각

 국수를 뽑는 과정은 그 자체로 수행처럼 보인다.
그는 기계 대신 수동 제면기를 사용해 면을 뽑는다.
손잡이를 돌리면 반죽이 서서히 밀리며 얇아지고, 가늘어지며 길게 풀려 나온다.
“기계는 빠르지만, 소리도 세고 마음이 흐트러져요. 손으로 돌리면 리듬이 생겨요.”

면이 나올 때 그는 손으로 살짝 잡아당겨 흐름을 조절한다.
국수가 일정한 속도로 흐르지 않으면 길이가 불균형해지고 식감도 달라진다.
“손끝에서 힘을 살짝만 빼면 면이 부드러워져요. 쥐면 질겨지고요.”

그는 국수 가락 하나하나에 온도를 느낀다.
“따뜻하면 면이 살아 있고, 차가우면 숨이 죽어요.”
그래서 그는 면을 뽑을 때 절대 에어컨을 틀지 않고, 방 안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작업한다.

뽑은 면은 겹겹이 돌돌 말아 서늘한 그늘에 놓아두고 잠시 식힌다.
그 과정에서 면의 수분이 고르게 퍼지고, 탄성이 생긴다.
이 모든 과정은 조용하고 천천히 흐른다. 사찰의 시간처럼, 국수도 조급함이 없다.

제면기에서 면을 천천히 뽑아내는 백양사 수작업 국수 제작 과정

육수가 아닌 물맛으로 결정된다 – 조화의 국수 한 그릇

 백양사 국수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가 아닌 ‘국물’**이다.
고기나 해산물 없이, 다시마, 표고버섯, 무, 말린 배추 등을 우려 만든 사찰식 육수는
맑고 투명하지만, 깊은 맛을 품고 있다.
“국물은 강하지 않아야 해요. 대신 면이 힘을 받아야 하니까요.”

그는 면을 삶을 때도 ‘물결’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펄펄 끓는 물에 한 방향으로 저어주지 않으면, 면이 부서지거나 들러붙는다.
그는 면을 넣고 젓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물이 면을 품을 수 있게 조용히 도와줘야죠.”

삶은 면은 얼음물에 헹군다. 이 과정에서 면발이 탱탱해지고, 겉면의 전분이 씻겨 나가
맑고 시원한 국물과 어우러지기 쉬워진다.
그는 차가운 물을 사용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열을 식히는 게 아니라, 면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거예요.”

완성된 국수 위에는 김가루, 무절임, 약간의 깨소금이 올라간다.
그 어디에도 자극적인 맛은 없다.
고요하게 흘러가는 한 그릇, 입 안에서 말이 아닌 느낌으로 전해지는 맛이다.

 

한 그릇의 온기 – 다음 세대와 함께 나누는 면의 철학

 그는 이제 60대 중반이다. 국수만 만들어온 지 40년이 넘었다.
백양사 국수집은 따로 간판도 없고, SNS도 없다.
그런데도 늘 줄이 선다. 이유는 간단하다.
“맛보다 마음이 기억에 남으니까요.”
그의 국수는 입맛보다 사람의 속을 먼저 어루만지는 음식이다.

최근 그는 사찰에서 국수 만들기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반죽부터 면 뽑기, 삶기, 국물 내기까지 하루를 통째로 쓰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기술을 가르치기보다 면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를 전하려 한다.
“국수를 만들 줄 안다고 국수 장인은 아니에요. 한 그릇을 온전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하죠.”

젊은 참가자 중 한 명은 이 체험을 통해 국수 카페를 차리기도 했다.
그는 그 소식을 들으며 말했다.
“내 국수의 맛이 아니라, 내 국수를 만드는 ‘시간’이 전해진 것 같아 기뻐요.”

오늘도 장성 백양사 뒤뜰의 조용한 부엌에서,
물 흐르듯 면이 뽑히고 있다.
그 면은 말보다 조용하고, 조미료보다 깊은 마음을 품은 한 줄기 음식이다.

 

국수 한 그릇에서 명상을 배우다

 그는 국수를 만드는 일이 명상과 닮았다고 말한다. “국수 반죽을 치대는 동안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그저 밀가루의 상태만 느껴요.”
그 말처럼, 손끝이 반죽의 결을 읽고, 눈이 물결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과정은 사찰의 수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는 종종 면을 뽑는 시간을 ‘움직이는 참선’이라고 부른다. 조용히, 꾸준히, 하나의 일에 집중하면서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그의 국수를 맛본 사람들 또한 입을 모아 말한다.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속이 편해지고, 마음이 정리돼요.”
아마도 그것은 음식이 주는 포만감 때문이 아니라, 그 음식을 만든 이의 조용한 태도와 흐름이 그릇에 담겨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