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을찾아서

남해 죽방렴 멸치 어부, 조류와 기다림으로 잡아낸 은빛 시간

wellroundedboo 2025. 7. 7. 07:49

 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 이 조용한 바닷가에는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죽방렴이 아직도 바다 위에 남아 있다. 대나무로 만든 원형 구조물을 바다에 설치해, 물고기가 조류에 휩쓸려 들어오게 한 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전통 어로 방식이다. 이 죽방렴은 물고기를 쫓지도 않고, 그물을 던지지도 않는다. 오직 물길과 물때를 기다리며,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방식이다.
남해에서 3대째 죽방렴을 지키고 있는 한 어부는 말한다. “죽방렴은 고기보다 물을 보는 일이에요. 바다가 허락해야 멸치가 들어오죠.” 그는 그 어떤 기계도 쓰지 않고, 매일 새벽 대나무 틀을 살피며 은빛 멸치가 스스로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이 글은 고기를 쫓지 않고, 바다의 흐름을 읽으며 잡아내는 한 장인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죽방렴은 바다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 물길과 대나무의 원리

 죽방렴은 수백 개의 대나무를 직선 혹은 원형으로 배열해 만든다. 외형은 단순해 보이지만, 설치 위치, 조류의 방향, 수심, 해저 지형 등 수많은 변수에 따라 설계가 달라진다. 이 장인은 말한다. “바다는 매일 다르지만, 물길은 거짓말 안 해요. 그 길을 읽는 게 첫 번째예요.”

그는 매년 죽방렴을 직접 보수한다. 대나무는 매년 갈아줘야 하고, 고정 말뚝도 바닥에 다시 박는다. 손으로 직접 묶고, 조수 간만을 계산해 구조를 조정한다. “이건 나무로 만든 바다 지도 같은 거예요. 잘못 박으면 멸치는 안 들어와요.” 그는 죽방렴은 장비가 아니라, 바다 위에 그린 지식의 형태라고 말한다.

죽방렴은 고기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조류에 떠밀려 온 멸치떼가 방향을 잃고 죽방렴 안에 스스로 들어오도록 설계돼 있다. 즉, 인간의 힘이 아니라 바다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생선이 알아서 걸려드는 구조다. 이 점이 죽방렴을 독특하게 만든다.

그는 “죽방렴은 어업이 아니라 ‘기다림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하루 중 물때에 맞춰 1~2회만 멸치를 걷는다. 많이 걷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고기가 들어올 만한 물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것이 단순히 어부가 아닌 장인의 영역인 이유다.

 

 잡는 게 아니라 지키는 어업 – 죽방렴의 지속가능한 철학

죽방렴 멸치가 귀한 이유는 단순히 방식이 전통적이라서가 아니다. 죽방렴은 멸치를 다치게 하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로 잡아내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물에 긁히거나 상처 없이 잡힌 멸치는, 바로 삶아도 뿌옇게 흐려지지 않고 맑고 투명한 멸치 육수를 만든다.

그는 멸치를 건질 때도 통발이나 기계를 쓰지 않는다. 대나무망을 손으로 걷고, 들어온 멸치를 하나하나 바구니에 옮긴다. “살아 있는 멸치를 죽이면서 잡으면, 그건 음식이 아니라 잔인한 일이 돼요.”
그는 그렇게 하루에 많아야 20~30kg 정도만 채취한다.
“많이 잡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내일 또 바다에서 멸치가 들어올 수 있게 남겨둬야죠.”

죽방렴은 바다 생태계에도 무리를 주지 않는다. 물고기를 유도하지 않고, 치어는 그대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크게 유지한다. “죽방렴은 고기를 ‘끌어들여서’ 잡는 게 아니라, 바다에서 잠깐 ‘머물다’ 가는 애들만 얻는 거예요.”
이처럼 욕심 없이 필요한 만큼만 얻는 태도가 죽방렴 어업의 철학이다. 그는 그 철학이 오히려 멸치의 품질을 높인다고 말한다. 잡은 멸치는 바로 바닷물로 씻고, 3시간 이내에 삶거나 건조 처리를 한다. 상처 없이 잡고, 빠르게 가공된 멸치는 비리지 않고 깔끔한 단맛이 특징이다.
그래서 죽방렴 멸치는 ‘국물이 맑고, 냄새가 없으며, 오래 끓일수록 단맛이 우러난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류가 천천히 움직이는 남해 바다, 남해 죽방렴 멸치어부의 시간 속 흐름

한 줌의 은빛이 만드는 삶의 리듬 – 고기보다 시간을 잡는다

 그는 새벽 4시쯤 바다에 나간다. 손전등 하나 켜고 바다의 소리를 듣는다. “물이 빠지는 소리, 들어오는 속도, 파도 결을 보면 멸치가 오는지 감이 와요.” 날씨 앱보다 정확한 그의 감각은 수십 년간의 물살 관찰에서 비롯된 일상의 감각이다.

물때가 맞으면 죽방렴 안으로 들어가 고기망을 확인한다. 많을 때도 있고,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없다고 낙담 안 해요. 오늘은 바다가 쉰 거니까.” 그는 그날의 물길 상태, 물 온도, 조류의 흐름을 기록한다. “10년치 기록이 있어요. 그게 다음 해 물길을 읽는 데 도움이 돼요.”

 

멸치를 걷고 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선별 작업에 들어간다. 큰 것, 작은 것, 상처 난 것, 살아 있는 것으로 나눈다. 건멸치용, 육수용, 선물용, 젓갈용 등으로 분류한다. 이 작업은 그와 아내, 동네 어르신들 몇 명이 함께한다.
고기보다 사람의 손과 눈이 더 많이 들어간 작업이다.

그는 말한다. “죽방렴은 멸치를 잡는 게 아니에요. 시간의 흐름을 잡는 일이죠. 나도 이 바다랑 같이 늙어가는 거예요.”
바다와 함께 흐르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그의 매일이다.

 

바다를 물려주는 방식 – 다음 세대를 위한 죽방렴의 의미

 죽방렴은 누구나 배울 수 없다. 설치 비용도 많고, 수익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일은 수익보다 바다를 읽는 재미로 하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요즘 젊은 어부 2명과 함께 일을 나누고 있다.
“처음엔 물때도 못 읽었죠. 근데 어느 날부터 걔네가 바람 냄새 맡고 ‘오늘 고기 있어요’ 그러더라고요. 이제 됐어요.”

그는 죽방렴을 기술이 아니라 감각을 전수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물때표보다 귀와 손, 발로 바다를 느끼는 방법을 먼저 알려준다.
그의 기록 노트에는 매일매일 물의 흐름, 고기의 양, 파도 세기, 구름 상태까지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다.
그 노트는 다음 세대를 위한 살아 있는 바다 일지다.

그는 요즘 죽방렴 옆에 어린이 체험용 소형 죽방렴도 설치해 교육에 활용한다.
“바다에서 고기 잡는 게 아니라, 고기와 함께 살아가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아이들은 물안경을 쓰고 멸치가 죽방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바다가 신기하다”고 외친다.

오늘도 남해의 바닷물 속, 죽방렴의 대나무가 조용히 물살을 갈라낸다.
고기를 향해 움직이지 않지만, 흐름을 기다리며 은빛 시간을 잡아내는 가장 오래된 어업 방식은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