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을찾아서

예천 한지 장인, 닥나무 껍질로 이어가는 천 년의 기록

wellroundedboo 2025. 7. 3. 08:58

 경상북도 예천은 예로부터 ‘한지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바람 많고 물 맑은 이 땅은 닥나무 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지녔고, 자연스럽게 전통 한지 제작이 깊게 뿌리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전국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한지 공방 중에서도 예천 한지는 독자적인 품질과 방식으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기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곳에서 40년 넘게 한지를 만들어온 한 장인이 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일을 돕다 시작했지만, 지금은 이 지역의 유일한 전통 한지장(韓紙匠)으로 불린다. “한지는 종이가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눌러 담는 기록이에요.” 그는 말한다.

그가 만드는 한지는 문화재 복원용으로도 쓰이고, 국내외 박물관과 고서 복원 작업에 사용된다.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든 종이는 1000년이 지나도 찢어지지 않고 색이 변하지 않으며, 잉크를 흡수하되 번지지 않는다. 이 글은 종이를 만든다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뿌리의 나무 껍질로 시간을 빚고 있는 이야기다. 기술을 넘어 철학이 전해지는 기록이다.

예천 전통 한지를 만드는 장인이 닥나무 껍질을 삶고 있는 모습

 

한지를 만들기 위해 닥나무를 삶고 두드리는 일 – 하루 종이는 한 장이면 충분하다

 한지는 닥나무로 만든다. 이 장인은 예천 근처 산자락에 200그루 넘는 닥나무를 직접 기른다. 나무는 11월이 되면 잎이 떨어지고 수분이 마를 때 베어낸다. 그 뒤 껍질을 벗겨 말린 것을 ‘백피(白皮)’라 하는데, 이것이 한지의 원료다. “나무껍질 한 장에, 계절이 담겨 있어요.” 그는 매해 날씨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년 종이의 성질도 조금씩 다르다고 말한다.

백피는 깨끗이 씻어 재를 푼 물에 삶은 뒤, 일일이 손으로 검은 점을 골라낸다. 그리고 수천 번 두드리는 과정을 거친다. 이는 닥섬유를 고르게 풀기 위한 일종의 물리적 정제 과정이다. 기계로도 가능하지만, 그는 손으로 두드리는 방식을 고수한다. “기계는 일정하지만, 그날의 습도와 섬유의 질감을 느끼지 못하죠.”

이렇게 다듬은 섬유는 맑은 물에 띄우고, 황촉규 뿌리에서 추출한 점액질을 더해 종이를 뜬다. 전통 한지의 독특한 촉감과 질긴 내구성은 바로 이 천연 점액 덕분이다. 종이를 뜨는 틀(발)은 대나무로 만든 손발이며, 물 위에서 결을 고르게 하기 위해 수십 번 흔든다. 이 과정 하나하나가 정밀함을 요구하는 손의 작업이다.

그는 하루에 종이 10장 이상 만들지 않는다. 어떤 날은 한 장만 만들고 하루를 마친다. “종이를 많이 만든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한 장을 정확히 만드는 게 중요하죠.” 이처럼 한 장의 종이는 하루치의 리듬과 감각, 그리고 장인의 호흡까지 담고 있는 셈이다.

 

종이는 그릇이다 – 기록과 복원의 중심에 선 한지

 예천 한지는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다. 현재 이 장인이 만든 한지는 조선시대 고문서 복원, 고서 재인쇄, 불교 경전 보존, 그리고 일본 교토 국립박물관의 복원 작업에도 사용되고 있다. "오래된 기록을 다시 쓰려면, 그걸 담을 종이도 오래 살아야 하잖아요."라는 그의 말처럼, 종이는 단순한 재료가 아닌 기억을 담는 그릇이다.

전통 한지는 현대 종이와 달리 수명이 길고, 섬유가 촘촘하여 잘 찢어지지 않는다. 화학처리를 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도 색이 누렇게 변하지 않으며, 먹을 먹였을 때 글씨가 번지지 않고 고르게 스며든다. 그래서 서예가, 동양화 작가, 전통 인쇄 전문가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재료다.

그는 전시용 고급 한지 외에도 생활 속에서 쓸 수 있는 다양한 용도로 한지를 확장하고 있다. 창호지, 조명등, 엽서, 손수건, 봉투까지. 그가 직접 만든 한지로 일상의 물건을 만들면 손님들의 반응도 다르다. “촉감이 너무 좋아요”, “종이인데 따뜻해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한지의 본질은 결국 ‘사람의 손길’이라고 다시금 느낀다고 한다.

그의 한지는 누가 봐도 질기고 고운 종이지만, 그가 보기에 한지는 단지 물성을 가진 소재가 아니다. “한지는 시간을 버티는 종이에요. 사람의 기억, 한 세대의 문화, 그리고 삶의 감정까지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죠.” 그의 말처럼 한지는 단지 과거의 기술이 아니라, 오늘을 기록하고 내일을 잇는 연결 고리다.

 

껍질에서 시작된 철학 – 종이보다 더 질긴 손의 기억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하지 않고 히려 농부에 가깝다고 말한다.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키우고, 껍질을 벗기고, 섬유를 삶는 일이 모두 자연과 함께하는 리듬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계절을 무시하면 좋은 종이가 안 나와요. 종이도 결국 살아 있는 물질이거든요."

요즘은 젊은이 중에 한지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수익이 불확실하고, 일이 고되기 때문이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지역 청년들과 함께 한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종이 한 장이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많은 손과 시간이 드는지를 알게 되면, 쉽게 버리지도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요즘은 뭐든 쉽게 만들고 쉽게 버리잖아요. 그런데 이 종이는 그게 안 돼요. 너무 많은 게 들어 있으니까요.”

그는 은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새벽이면 나무를 돌보고, 공방에 나가 물을 데운다. 종이를 뜨는 손길은 늙었지만, 종이에 담기는 정성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그는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 종이가 사람들 손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사람은 가도, 종이는 남거든요. 그게 내가 이걸 계속 하는 이유죠.”

오늘도 예천의 한 작업장에서는 닥나무 껍질이 조용히 삶아지고, 손끝의 온도만큼 정직한 종이가 한 장 한 장 떠진다. 그것은 기록을 위한 종이가 아니라, 기록 그 자체가 된다. 사람의 시간이 닿아 만들어진 종이, 그리고 그 종이를 만든 사람의 삶까지 함께 눌러 담은 ‘한 장의 역사’가 그렇게 오늘도 완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