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활용공간 리뷰

폐교를 개조한 사운드 아카이브 스쿨

wellroundedboo 2025. 8. 12. 11:47

사람이 떠난 공간은 조용해진다. 그러나 ‘조용함’은 결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먼지 속에 오래 묻힌 소리, 낡은 나무마루가 내는 삐걱임, 바람이 창틀을 스치는 낮은 울음이
그 공간의 과거를 은밀하게 들려준다. 기자는 전라북도 완주에 생긴 사운드 아카이브 스쿨을 찾아갔다.
이곳은 15년 전 문을 닫은 폐교를 개조해 사라져 가는 소리와 지역의 음향 문화를 기록·보존하는 작은 사운드 박물관이었다.
‘들리는 박물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곳의 목표는 단 하나, “사라진 소리를 다시 들려주는 것”이었다.

 

폐교 복도 끝 교실에서 만난 첫 소리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들려온 건 오래된 학교종 소리였다.
운영자는 기자에게 “이 소리는 1980년대 이 학교에서 실제로 울렸던 종소리”라고 말했다.
교실 중앙에는 헤드폰과 녹음기가 놓여 있었고, 방문객들은 각자 원하는 시기의 ‘소리 파일’을 재생할 수 있었다.

‘봄 운동회’, ‘겨울 눈 내리는 소리’, ‘아침 조회’, 심지어 ‘점심시간 급식소의 국 끓는 소리’까지 모두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운영자는 5년 넘게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추억 속의 소리를 복원해왔다고 했다.
“사람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까지, 다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어요.”

폐교를 개조한 사운드 아카이브 스쿨에서 소리를 배우고, 잃어버린 소리를 복원하다

나만의 소리를 녹음하는 시간

음악실이었던 공간은 이제 ‘소리 공방’으로 변해 있었다.
기자는 ‘나만의 하루 소리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손님들은 각자 소리를 채집하러 운동장, 교실, 복도, 마을 길로 나섰다.
기자는 먼지 쌓인 창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벽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녹음했다.

돌아와서 녹음한 파일을 편집기로 옮기자 작은 소리들이 이어져 하나의 짧은 ‘폐교 교향곡’이 만들어졌다.
운영자는 “이게 바로 공간의 심장 소리”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울렸다.
이 소리는 지금 이 순간 아니면 다시는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리가 전하는 기억의 힘

전시관 한편에는 ‘사라진 마을의 소리’ 코너가 있었다.
여기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기찻길 소리, 문 닫힌 상점의 셔터 소리,
사라진 버스 노선의 엔진음이 보관되어 있었다.
운영자는 “소리를 보존하는 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기자는 폐교의 한 구석에서 이어폰을 끼고 ‘봄날 매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순간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직전의 설렘이 온몸을 타고 되살아났다.
소리는 시간 여행의 가장 강력한 열쇠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폐교가 들려주는 마지막 수업

해가 기울 무렵, 기자는 마지막 교실 ‘사운드 라이브러리’에 들어섰다.
책 대신 수백 개의 소리 파일이 정리된 서랍이 있었다.
운영자는 말했다. “언젠가 이 학교가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이 소리들은 다른 곳에서 계속 울릴 겁니다.”

기자는 폐교를 나서며 아까 녹음한 ‘벽시계와 바람 소리’를 휴대폰에 저장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공간은 무너져도, 그 안의 소리는 살아남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뛰고 있을 것이라고.

 

귀로 배우는 교과서

기자는 돌아가기 전 운영자에게 “왜 소리를 이렇게까지 모으시냐”고 물었다.
운영자는 잠시 웃더니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기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귀로 남은 기억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요.” 그 말은 오래된 나무마루를 밟을 때의 ‘끼익’ 소리,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어린 시절 듣던 라디오의 미세한 잡음을 순식간에 떠올리게 했다.
기자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학교의 교과서는 책이 아니라 소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소리로 이어진 폐교의 심장

해가 저물자 운동장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 깃털이 부딪히는 작은 바람 소리가 교실 창문을 스쳤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곧 사라질 그 소리를 누군가는 여전히 잡아두고 있었다.

기자는 폐교를 떠나며 휴대폰 속 ‘벽시계와 바람 소리’ 파일을 재생했다.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하루 동안 느낀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 살아 숨 쉰다는 것을.

 

소리가 불러오는 시간의 결

기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이어폰을 꽂았다.
폐교에서 녹음한 ‘벽시계와 바람’의 조합은 도심의 소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하루 전의 교실 풍경과 운영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함께 떠올랐다.

소리는 눈처럼 쌓이지 않지만, 귀와 마음 어딘가에 겹겹이 남는다.
그렇게 남은 층위가 많아질수록 사람의 기억은 더 깊어지고 공간은 더 선명해진다.
사운드 아카이브 스쿨은 그 층위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기자는 시간을 ‘듣는 법’을 배웠다.

 

폐교의 침묵이 만들어낸 배움

폐교는 처음엔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는 누구나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찾아낼 수 있는 수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었다.
기자는 이 사실이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느꼈다.

겉으론 조용해 보이지만 사람 마음 속에는 늘 작은 소리들이 있다.
그 소리들은 외면하면 사라지고 귀 기울이면 조금씩 커진다.
‘사운드 아카이브 스쿨’은 바로 그 귀 기울이는 연습장이었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자신의 심장 박동까지 모두 폐교가 들려주는 마지막 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