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글씨나 그림이 벽에 걸려 바람에 조용히 흔들릴 때, 사람들은 작품을 본다. 그러나 그 작품을 감싸는 천과 종이, 그리고 그것을 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물인 ‘족자’는 대개 주목받지 못한다. 하지만 전주 한옥마을 안쪽, 조용한 골목에서 수십 년 간 족자만을 만드는 한 장인이 있다. 전통 족자 제작 장인 김영만 씨는 작품을 ‘싸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이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글씨가 보이기 전에 먼저 여백이 보여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 한 장 위에 그려진 선보다, 그걸 감싸는 여백과 공간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족자는 단순한 틀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이 걸리는 방, 사람의 시선, 그리고 마음의 흐름까지 고려한 조용한 조율이다.
전주 족자 장인이 한지 위에 덧대는 건 시간과 손의 결
족자를 만들기 위해 그는 먼저 글씨나 그림이 그려진 원본을 살핀다. 어떤 작품은 세로로 긴 서예이고, 또 어떤 것은 수묵화나 문인화일 때도 있다. 그 작품을 감싸기 위해 한지, 비단, 삼베, 모시, 먹지 등 다양한 재료를 작품의 성격에 맞게 고른다. “글씨가 차가우면 따뜻한 천을, 색이 강하면 부드러운 한지를 씌워요.” 재료를 고른 뒤, 그는 종이와 천을 수분 조절하며 켜켜이 덧댄다. 이 과정은 기계가 하지 못한다. 종이가 숨을 쉬는 방향과 늘어나는 성질, 그리고 눌리는 감각까지 모두 손끝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한지를 두 장 이상 겹쳐 붙이되, 절대 주름이 생기지 않게 작업한다. 이때 사용되는 풀은 전통 방식으로 만든 밀풀이다. 온도와 습도를 계산해 정확한 농도로 조절하지 않으면 종이가 들뜨거나 쭈글해지기 때문이다. “붓글씨는 정적인데, 족자는 움직임이 있어요. 보이지 않게 흔들릴 때 더 완성됩니다.” 그래서 족자는 단순한 틀을 넘어서, 숨 쉬는 액자이자 살아 있는 배경이 된다.
족자의 길이는 글보다 마음을 잰다
족자는 단순히 작품을 둘러싸는 틀이 아니다. 글의 길이, 장르, 표현법에 따라 족자의 비율이 달라진다. 그는 족자를 만들 때 먼저 작품의 ‘멈춤’을 계산한다. “글씨가 끝나는 자리에 시선이 머물고, 거기서 여백이 이어져야 해요.” 그래서 족자의 상단은 때로는 비워두고, 하단은 길게 뽑는다. 이는 한국 전통 회화와 서예에서 중요한 ‘공간 미학’과 깊이 맞닿아 있다.
그는 족자의 비율을 정할 때 나무 자도, 컴퓨터도 쓰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손과 눈으로 재고, 오랜 감각으로 비율을 조율한다. 족자의 폭은 너무 넓으면 그림이 작아 보이고, 너무 좁으면 답답해진다. 그는 그 사이에서 정확한 ‘시선의 길이’를 찾는다. “족자는 눈의 길이를 만드는 겁니다. 얼마나 머물다가, 어디로 이동할지 정해주는 거죠.” 그렇게 족자는 단순한 포장이 아닌 작품의 흐름과 호흡을 결정하는 장인의 설계도가 된다.
족자는 작품을 감싸는 옷이자, 말 없는 전시
완성된 족자는 다시 펼쳐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아 보관한다. 그러나 그는 족자를 만들면서 항상 그것이 걸릴 공간을 상상한다. “어떤 족자는 불빛 아래에서 흔들려야 하고, 어떤 건 조용한 방 안에 있어야 하죠.” 족자는 공간과 사람의 움직임까지 고려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는 족자 하단의 막대(족장)도 직접 깎고 다듬는다. 나무의 색, 굵기, 무게감에 따라 족자의 전체 균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는 족장을 깎으며 말한다. “족자는 말이 없어요.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글과 그림이 제 목소리를 갖도록 도와주는 거죠.” 족자는 전시장 밖에서도, 서재에서도, 혼자 있는 방 안에서도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것은 소리가 없지만, 시선으로 완성되는 전통이고, 지금 우리가 계속 이어가야 할 시각 문화의 한 형태다. 그는 족자 하나를 만들 때마다, 작품이 아닌 그걸 보는 사람의 눈까지 고려한다. 그가 만드는 건 단지 액자가 아니라, 작품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여백과 길이다.
조용한 틀 안에 남는 진짜 울림
김영만 장인이 만든 족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족자를 마주하는 사람은 조용히 멈추고, 눈길을 오래 두게 된다. 그가 덧댄 종이와 천, 여백과 길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작품이 자신을 말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마음의 무대’다. 글씨보다 먼저 보이는 건 여백이고, 그 여백에 담긴 시간과 손의 결은 읽히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는 오늘도 족자의 길이를 재며,
사람의 시선과 감정을 한 장의 종이 위에 담아낸다. 기억은 시간이 지우지만, 손으로 만든 족자는 그 기억의 울림을 다시 남긴다. 그래서 족자는 말 없는 예술이지만, 오래된 마음 하나쯤은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조용한 기록이 된다.
김영만 장인이 족자를 짓는다는 말에는 단순한 표현 이상의 무게가 담겨 있다. 그가 만든 족자는 누군가의 글씨를 감싸는 틀인 동시에, 그 글을 쓴 사람의 마음까지 함께 보호하고 기억하려는 장인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족자는 단지 벽에 걸리는 장식이 아니다. 그 안에는 글을 쓴 이의 숨결과, 그 글을 담기 위해 애쓴 사람의 손끝이 공존한다. 글씨는 사라질 수도 있고, 그림은 빛에 바랠 수도 있지만, 족자가 감싸는 공간은 오래도록 그 의미를 품는다. 그래서 그는 족자를 ‘보이는 마음의 틀’이라고 말한다. 단단한 듯 부드럽고, 정적인 듯 살아 있는 족자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 조용한 힘이 족자를 족자답게 만든다. 김 장인의 작업은 단순한 기술의 전수가 아니라, 사람과 예술, 그리고 시선이 머무는 방법에 대한 전통의 계승이다. 그는 오늘도 글씨보다 여백을 먼저 읽고, 종이보다 그 속의 마음을 먼저 만진다. 그렇게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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